얼마 전 태국에 한국의 첨단기술이 적용된 상설 전시관이 최초로 개관했다. 한국 디지털 헤리티지 사상 해외 진출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해당 국가의 국립(National) 박물관에 우리의 기술력이 보급됐다. 상설전시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에 공개된 전시물은 태국의 아유타야 시대 문화유산을 소재로 개발한 실감형 콘텐츠다. 우리나라의 신기술융합콘텐츠기업 (주)펀잇(FunIT)과 ICT공공기관 부산정보산업진흥원(BIPA)이 주관했다. 아유타야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아유타야 왕조는 태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최전성기를 누렸던 시대다. 일찍이 포르투갈인에 의해 ‘세계 무역의 중심지’라고 불렸을 정도로 왕성한 교역 활동을 펼쳤다. 위치가 유럽과 아라비아, 인도에서 오는 교역물자들이 한데 모이는 지리적 특성이 있다. 이런 장점을 활용해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아유타야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외교 사절을 보낸 나라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건국 1년 후 야유타야는 상인을 포함한 사신단을 조선에 여러 차례 파견한 기록이 있다.
한국의 실감콘텐츠 인계식은 6월 1일 이뤄졌다. 이날 사타폰 티탐(Sathaporn Thitham) 태국 문화부 부국장이 주재한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산정보산업진흥원 정문섭 원장과 1년간 실감콘텐츠를 제작한 펀잇의 최인형 대표, 문준석 이사 그리고 문화유산디지털복원가로 활동하는 박진호 박사(고려대학교 교수) 일행이 참석했다.
사업은 ‘한ㆍ아세안 ICT 융합 빌리지’의 하나로 시작됐다. 이는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과 부산정보산업진흥원이 가상융합기술을 바탕으로 한-아세안 ICT 교류 확대와 상호 동반성장을 목적으로 한다. 2020년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부산광역시의 지원으로 추진됐다.
새로운 한류(韓流), K-뮤지엄
2019년 이래 한국의 국공립 및 사립 박물관들은 ‘실감형 콘텐츠’를 화두로 다양한 첨단 기법의 디지털 전시를 구축ㆍ서비스해 왔는데, 이번엔 해외에 우리의 기술력을 입증한 셈이다.
박진호 박사는 “우리나라의 디지털 복원 기술로 태국의 유물과 유적을 복원해 전시한다는 사실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라며 “이와 같은 복원 기술의 수출을 ‘K-뮤지엄’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K-뮤지엄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K-컬처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하나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고 전했다.
태국에 오픈한 전시의 핵심은 그간 한국이 쌓아왔던 몰입형(Immersive) 기술이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확장현실(XR) 기술들을 태국의 대표 박물관에 처음으로 적용하게 된 것이다.
방콕국립박물관 아유타야실에 설치된 실감콘텐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유물정보 인터랙티브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미디어월 콘텐츠 구축이다. 지난 1년의 개발기간 끝에 완성됐다. 이로써 태국 방콕국립박물관은 최신의 ICT(정보통신기술)를 활용한 디지털 박물관으로 아세안 국가 중 제일 먼저 이 분야를 선점하게 됐다.
유물정보 인터랙티브 시스템은 아유타야 시대에 제작된 두 개의 캐비닛을 대상으로 했다. 아유타야 사람들과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모습이 캐비닛에 그려져 있다. ‘디지털 돋보기’로 캐비닛을 전후좌우로 360도 돌려본다든지, 캐비닛에 그려진 각종 동‧식물들의 모습을 확대해서 볼 수 있도록 개발했다.
종래 육안에만 의존했던 유물을 첨단매체로 쉽고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디지털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이번 태국방콕국립박물관 실감콘텐츠의 백미는 17세기에 그려진 ‘아유타야 도성(都城)’. 고해상도 미디어월(Media Wall)로, 디스플레이 기반의 미디어아트 작품. 제목은 ‘아유타야의 영광(Glory of Ayutthaya)’이다. 이 그림은 당시 시암의 도성인 ‘아유타야 성(城)’을 넓은 파노라마 형태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3백 년 전 아유타야는 마치 섬처럼 둘러싸인 도시였다.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도성을 관통하는 수많은 수로 때문에 아유타야 성은 ‘아시아의 베니스’로도 불리었다.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빙봉(Johannes Vingboons)이 1663년 당시에 그린 것으로, 이 아유타야 도성에 산재한 사원과 유적을 유럽식 조감도 형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아유타야는 네덜란드와의 무역으로 해양 실크로드 역사에 있어 당시 동남아 그 어떤 왕국보다 풍요로웠다.
아유타야 미디어아트의 스토리라인도 그런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데, 운하로 둘러싸인 아유타야의 모습과 17세기 유럽과 중국, 일본 등지에서 방문한 무역선 모습을 디지털로 재현했다. 과거 아유타야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원작을 애니메이션 기법의 미디어아트로 만나게 된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펀잇 문준석 이사는 “실감콘텐츠를 설치한 공간이 대한민국이 아닌 태국이다 보니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고 태국 문화유산에 대한 고증이나 제작에 따른 단계별 컨펌도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라서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의 문화기술력을 수출한다는 자부심으로 오픈할 수 있었다”며 지난 1년간의 소회를 밝혔다.
방콕은 연간 3천만 명의 외래 관광객이 방문하는 아세안의 대표적 관광명소다. 앞으로 방콕국립박물관의 실감콘텐츠는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문화기술(CT)을 전파하는 교두보가 된다. 지난 1년간 실무 소통을 담당한 부산정보산업진흥원의 변성일 과장은 “아유타야의 역사와 유물을 디지털 전시로 서비스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태국을 방문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기술력을 선양할 수 있게 돼 보람 있었고 국가 간 문화교류를 잇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 한국의 디지털 헤리티지를 통한 문화수출
이번 방콕국립박물관 아유타야 신기술융합콘텐츠의 국제교류와 기획을 이끈 박진호 고려대 교수는 “아세안의 대표 박물관인 방콕국립박물관에 신기술융합콘텐츠가 처음 적용됐지만 향후 동남아를 넘어 중동, 아프리카로 확장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번 방콕국립박물관이 K-Museum의 시작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디지털 헤리티지의 문화교류는 해외 박물관의 유물이나 유적을 대상으로 디지털화하고, 이를 디지털 콘텐츠로 활용하는 다양한 공적개발원조(ODA)를 추진했다.
지난 2006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해외의 국립(National) 박물관에 한국의 디지털 헤리티지 기술력이 적용된 프로젝트는 이번이 1호 케이스다.
관련기사
- [이창근의 헤디트] 신한류 효과, K-관광으로2023.05.08
- [이창근의 헤디트] 첨단 서라벌이 우리에게2023.03.16
- [이창근의 헤디트] 세계가 주목할 철의 왕국2023.02.03
- [이창근의 헤디트] 강릉대도호부관아 미디어아트의 장소성과 동시대성2023.02.01
K-Pop, K-Movie 등 한국이 ‘K(케이)’로 상징되는 한류 확산에 있어, 이번 태국방콕국립박물관 신기술융합콘텐츠 프로젝트는 ‘K-Museum’이라는 비전으로 새로운 한류(韓流)를 조성했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헤리티지 기술력까지 해외에 보급하는 또 다른 한류의 문화수출 성과를 이룬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외교 사절을 보낸 태국과의 인연이 오늘의 K-뮤지엄으로 다시 연결됐다. 한국의 문화수출은 이제 테크놀로지다. 특히 문화유산에 관한 한 한국의 디지털 헤리티지 기술력, 신기술융합콘텐츠 제작 노하우가 태국을 넘어 전 세계 주요 박물관으로 확장되리라 본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