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든 성배. 명예롭지만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를 비유해서 쓰이는 관용구다. 최근 누적된 영업적자, 전기요금 인상 등 불거진 한국전력공사의 사장 자리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공공성을 담지하고 있는 기업의 수장으로써 전기를 싼 가격에 국민에게 공급해야 하지만 한전의 경영 실적도 동시에 챙겨야 한다. 다시 말해 한전 사장은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 '독이든 성배'와 같은 자리다.
정승일 전 한전 사장은 지난 19일 한전의 누적된 적자, 방만경영 등에 책임지고 사퇴했다. 한전의 사장 임기가 3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 전 사장은 잔여 임기 1년여를 앞두고 불명예 퇴진한 것이다.
정 전 사장은 2021년 6월 지난 정부 시절 한전 사장 자리에 선임됐다. 정 전 사장이 취임한 첫 해 한전은 5조8천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그 이듬해 영업손실은 32조6천억원대까지 불어나며 경영난은 가중됐다. 정 전 사장이 선임되기 전 지난 2020년 한전이 4조80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둔 것을 견줘볼 때 언뜻 정 전 사장 체제하의 한전은 정말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데이터를 살펴보자. 한전이 발전사로부터 전력을 구매하는 가격인 전력도매가격(SMP)은 흑자를 기록한 지난 2020년 키로와트시(KWh, 연평균)당 68.87원대에서 2021년 94.34원으로 치솟았다. 더군다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며 국제 에너지 가격이 출렁이기 시작한 2022년엔 SMP 가격이 무려 두배 가까이 오른 196.65원을 기록했다.
민수용 전력 소매가격은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정하는 탓에 한전의 요금 조정 운신의 폭은 그리 크지 못했다. 결국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팔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경영체제가 고착화 됐다.
한전의 누적 적자는 올해 1분기 기준 약 40조원. 당정은 이 같은 원인은 모두 외면했다. 요금 인상에 대한 필요성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요금 인상의 비판을 면피하기 위한 대안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한전의 방만경영, 억대 연봉 프레임이 씌워졌고 정 전 사장에 대한 거취 압박도 시작됐다. 정 전 사장은 결국 투항했다. 더욱이 공기업의 연봉 체계는 정부가 정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같은 프레임도 우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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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국제 에너지 가격에 맞게 요금을 유연하게 조정을 할 수 있는 연료비조정단가와 관련한 논의도, 에너지 체계 개편 등도 모두 허공으로 날아갔다. 구조적 원인은 외면한 채 '전정권 인사와의 불편한 동거'를 할 수 없다는 당정의 의지만 다시 확인된 셈이다.
"열심히 일 한 사람들을 전 정권 사람이라는 이유로 모두 적폐로 돌려버리면 누가 공직 사회에서 책임지고 일을 할지 모르겠다"던 한 퇴직 산업부 고위관료의 말도 곱씹어 볼 만 하다. "마약은 정치를 모른다"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말을 빌려 글을 마친다. 에너지는 정치를 모른다. 누가 사장에 앉든 에너지 체계를 확실히 잡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