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만 반도체 주주 외교 탓에 잠 못 잔다

[이균성의 溫技] 백척간두에 선 우리 반도체

데스크 칼럼입력 :2023/04/25 13:20    수정: 2023/04/25 15:35

삼성전자 주주는 600만 명이고 SK하이닉스의 주주는 100만 명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에 투자한 사람이 700만 명인 셈이다. 이중 이재용 회장 등 굵직한 주주나 기관투자자는 많아야 수십 곳일 테고 나머지는 모두 소액주주일 것이다. 그러나 소액(少額)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각각의 소액은 사실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뭉쳐놓은 꿈이라 할 수 있다. 그 소중한 꿈들이 지금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1인 가구를 합쳐 우리나라 가구수가 2천100만 가구인 점을 감안하면 세 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반도체 주주다. 투자 목적은 다양하겠지만 부실한 복지체제 탓에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려는 의도도 무시하지 못할 테다. 왜 반도체였겠는가.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치킨 게임을 벌이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안전하고도 지속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이 허황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경우 대규모 장치산업이어서 새로운 사업자가 진입하기 쉽지 않은 분야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고 쉽사리 추격이 허용되지 않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삼성전자가 핵심 경영전략으로 초격차(超隔差)를 내세운 것도 그런 자신감 때문이다. 중국이 이 분야 진출을 노리고 있지만 삼성은 언제든 충분히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날 수 있었겠다.

반도체 첨단 패키지 기술(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은 강고한 성(城)과 그러므로 이 성에 기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려는 700만 소액주주의 소박한 꿈은 그러나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다.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가 동맹(同盟)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이 생태계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 사이의 자유경쟁이 보장돼야 할 시장에 변형된 제국주의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지난해 처음으로 ‘칩4 동맹’을 제안하였을 때 그 음험한 의도를 알아차려야 했다.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면 안보상의 동맹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산업과 기업이 나라의 이름으로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불온하다. 기업 사이의 경쟁을 나라 사이의 경쟁으로 치환함으로써 시장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현재 수준은 시장 왜곡을 넘어 시장을 파괴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칩4 동맹’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사이 미국의 폭력은 더 거칠어졌다.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타국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독소조항들로 채워진 반도체법(Chips Act)을 발효시킨 것이다. 국가 안보를 내세웠지만 중국 경제에 타격을 가하자는 의도가 명백하고, 그 목적을 위해 우리 기업을 전위에 내세우겠다는 의도다. 허울만 좋은 동맹이란 이름으로.

이념이 인간의 지성을 송두리째 삼켜버리고 그런 까닭에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져 피비린내 풍기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 민족은 그 시대의 한 복판에서 그 어떤 민족보다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무려 70년 전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곳곳에 그 상흔이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다시 그 암흑세계로 돌아가려 하는가. 미국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왜 우리마저 다시 그 시대로 함께 가야 하는가.

한국 경제의 비약적 성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 덕분에 기틀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과 그로 인한 한중 수교 그리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구 소련의 해체 덕분이기도 하다. 경제에서 만큼은 국경을 허물고 모든 나라가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덕분에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가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국익은 여전히 그 체제와 동반한다. 그런데 WTO 체제를 주도한 게 미국이지만 그들은 이제 그 체제가 국익을 해친다고 보는 듯하다. 기술과 금융 같은 서비스와 소비 중심의 경제 구조 때문에 제조업이 붕괴된 탓이다. 그것은 그들의 책임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의 책임을 동맹이라는 허울 하에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데 있다. 왜 우리가 그들의 방만한 경제의 구멍을 메워줘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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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우리의 국익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이렇듯 상충되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에 우리가 만든 물건을 팔아야 한다. 미국의 요구 때문에 우리가 팔 수 있는 나라를 절반으로 줄여야 할 이유는 없다. 미국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그것이다. 대통령을 국빈 초청한 당일 마이크론이 빠질 수도 있는 중국 시장에 삼성이나 SK하이닉스가 납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라.

대통령이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국익을 중심에 두는 거다. 우리가 주장하는 국익은 명분도 훌륭하다. 지난 30년간 WTO 체제에서 세계 모든 나라가 동의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에서 그것을 설득하기 바란다. 반도체를 양보하는 건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세계 시장의 절반을 잃는 거다. 시장의 절반을 잃고 세금을 깎아 준들 무슨 소용인가. 경제 동맹은 망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