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EU반도체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반도체 패권경쟁이 전세계로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이어 유럽도 반도체를 경제안보의 핵심품목으로 인식하고, 자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을 확대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은 유럽에 반도체 제조시설에 투자할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유럽의 반도체 기술 투자 촉진으로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수출 기회 확대될 가능성에 주목된다.
EU반도체법 "2030년까지 시장 점유율 20%로 올린다"
EU는 19일 2030년까지 민간 및 공공에서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지원하는 EU반도체법을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유럽은 반도체법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하고, 반도체 생산에서 아시아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번 3자 협의는 지난 2022년 2월 EU 집행위가 최초로 제안한 EU반도체법안에 대해 유럽의회 및 이사회 3자가 정치적인 합의를 이룬 것이다. EU 관계자는 "지난해 칩 보조금 계획을 발표한 이후 유럽은 이미 1천억 유로 이상의 공공 및 민간 투자를 유치했다"고 말했다.
현재 EU는 세계 반도체 수요의 20%를 차지하며 미‧중에 이은 3대 소비시장이나 반도체 공급망 점유율은 10%에 불과한 상황이다. 유럽 종합반도체업체(IDM)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인피니언, NXP, 보쉬 등은 직접 반도체를 생산하면서 일부 물량은 TSMC, UMC, 글로벌파운드리,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에 위탁생산을 맡기고 있다. 또 유럽에는 파운드리 업체가 없다 보니 유럽 팹리스 기업들은 다른 국가의 파운드리 업체를 통해 생산할 수 밖에 없다.
EU반도체법은 제조시설 확대뿐 아니라 전문인력 양성, 차세대 반도체 기술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유럽은 33억 유로를 투입해 유럽 반도체 실행계획(Chips for Europe Initiative)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시장조사업체 IDC 연구원은 "EU반도체법은 단순히 제조공장을 짓는 것 이상이며, 미래를 위해 숙련된 반도체 인력 양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삼성·SK하이닉스, 유럽에 투자할 가능성 낮아...국내 소부장에 기회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향후 유럽에 투자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관측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성명서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생산시설이 EU에 위치하고 있지 않아서 직접적인 영향은 적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며 "EU내 반도체 생산설비 확충은 국내 소부장 기업의 수출 기회 확대로 이어져 기회요인도 병존한다"고 진단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만큼, 당분간 유럽에 새로 투자할 계획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삼성전자는 미국에 파운드리 팹을 건설 중이고 SK하이닉스는 미국에 패키징 팹 투자를 계획하고 있기에, 당장은 미국 투자를 진전시키는 것이 더 시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경제성이 없어서 유럽에 첨단 반도체 공장에 투자할 가능성이 낮다"며 "오히려 유럽에서 반도체 투자 촉진 정책이 시행되면서 우리 장비 회사들이 유럽에 공급할 기회가 생겨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노화욱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장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 중심이다 보니 유럽에서 부품 공급선이 크지 않다"며 "유럽 비즈니스 의존도가 높지 않아 이번 법안으로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신규로 반도체 공장을 짓게 되면 소재, 부품, 장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다"며 "국내에도 미국의 인텔, 마이크론, 대만 파운드리 등에 부품과 장비를 공급하는 경쟁력 있는 업체들이 상당히 많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매개자 역할을 해서 우리 기업이 수출을 확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텔·TSMC, EU 보조금 받으며 진출 선언
EU반도체법과 관련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인피니언 등 유럽 반도체 기업들은 보조금을 받는 것을 이미 확정 지었다. 해외 기업으로는 미국 인텔이 보조금을 받기로 결정했고, 대만 TSMC는 조율 중이다.
독일 반도체 기업 인피니언은 50억 유로(약 7조원)를 투자해 현지 드레스덴에 팹 건설을 올해 시작해 오는 2026년부터 전력 반도체와 아날로그 반도체 등을 생산할 계획이다. 유럽연합은 인피니언 팹 건설에 10억 유로(1조3937억원)를 지원한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는 지난해 말부터 7억3천만 유로(한화 약 1조174억원)를 투자해 이탈리아 카타니아에 실리콘카바이드(SiC) 웨이퍼 제조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이 중 2억9천250만 유로는 이탈리아 정부가 지급한다. 또 ST는 미국의 파운드리 업체 글로벌파운드리와 손잡고 프랑스에 57억 달러(7조9천453억원)를 투자해 작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미국 인텔은 독일 정부로부터 지원을 약속 받고 마그데부르크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기로 지난해 일찌감치 결정했다. 인텔은 EU 집행위원회의 승인하에 독일 정부로부터 전체 공사비 170억 유로의 40%에 해당되는 70억 유로의 보조금을 받는다. 다만 인텔은 최근 원자재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총 건설비가 인상됐다며 현재 추가 보조금 50억유로(약 6조9천600억원)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다. 또 인텔은 기존 아일랜드 공장에도 45억 유로를 투자해 규모를 두 배로 확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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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TSMC는 독일 드레스덴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두고 독일 정부와 보조금과 관련해 협상 중이다. TSMC는 독일에서 자동차와 특수 공정 칩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그 밖에 반도체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 ASML, ASML의 노광장비에 렌즈를 공급하는 독일의 자이스, 반도체용 소재 업체를 공급하는 벨기에 솔베이와 독일 BASF 등도 제조시설 확장을 위해 보조금을 신청할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