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부러웠던 까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곳곳의 분쟁에 개입한 ‘세계 경찰’ 역할을 자임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류의 부(富)를 증대시키는 데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겨지는 시장자본주의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화를 통한 국가 사이의 자유무역이야 말로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을 옹호할 수 있었던 배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력 때문이었다.
미국의 기술이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고 그것이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이 전제돼야 했다. 미국은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질 좋고 값싼 상품을 다른 나라에서 들여오는 대신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상품이나 서비스를 다른 나라에 팔았다. 다른 나라는 그 기술의 초격차를 좁히기 쉽지 않았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한 없이 부러웠던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미국은 그러나 이제 힘이 빠진 듯하다. 군사력을 토대로 한 ‘세계 경찰’ 역할이 예전 같지 않다. 특히 중동에서 그렇다. 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미국이 꼭 ‘세계 경찰’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므로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금과옥조였던 자유무역을 내팽개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과의 패권 다툼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경제에서만큼은 미국은 이제 예전 미국이 아니다.
문제는 경제의 영역에서 미국이 미국답지 않은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큰 피해를 보게 생겼다는 점이다. 주지하듯 한국 경제는 내수 시장의 한계 때문에 수출주도형으로 발전해왔다. 수출이 잘 돼야 우리 경제는 힘을 받는 구조다. 수출이 잘 되려면 자유무역이라는 조건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자유무역이 통제되면 자연스럽게 공급망 사슬이 흐트러지고 수출 또한 차질이 불가피하게 된다.
한국 반도체 산업 위기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한국 반도체는 이미 세계 최강이다. 하지만 파운드리와 비메모리 분야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한국 기업이 정부의 보호주의 우산 속에서 이 분야를 키우고자 하는 건 아니다. 기술력 제고를 통한 시장경쟁을 하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미국이 택한 ‘반도체 정치화’ 탓으로 본원적 경쟁을 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발간한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 신청요건의 문제점 및 대응방향' 보고서는 그 점에서 반갑다. 경제계에서 당연히 해야 할 소리였지만 그동안 정치계의 눈치를 보며 참아왔던 속내를 잘 정리했기 때문이다. 미국 ‘반도체 법(Chips Act)’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왔다. 겉으로는 국방과 안보 문제를 내세우지만 속셈은 첨단 기술 개발을 방해하자는 데 있다.
미국 속셈을 채우기 위해 정치 군사적인 동맹국까지 끌어들였다. 중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에 첨단장비가 반입되는 것을 막고, 중국내 첨단 반도체 공정의 생산능력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유예기간을 두기는 했지만 주요 반도체 생산시설을 중국에 둔 우리 기업으로서는 자칫 손발이 묶일 수 있다. 반대급부로 미국에 생산시설을 구축할 경우 보조금을 준다고 하지만 이 또한 독소조항이 많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특히 4가지를 문제 삼았다. 보조금 신청 조건을 따져본 결과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 △초과이익 공유 △상세한 회계자료 제출 △중국 공장 증설 제한 등은 우리 기업에 큰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시설 접근 허용’은 국방부 등 미국 정부가 우리 기업의 반도체 기술 및 영업 비밀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언제든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상세한 회계자료 제출’ 요건이 문제가 되는 것도 상장기업의 일반적인 재무자료 공개를 넘어서 주요 생산 제품, 생산량, 상위 10대 고객, 생산 장비, 원료 등 기업의 내밀한 영업 기밀까지 요구한다는 점 때문이다. ‘초과이익 공유’나 ‘중국 공장 증설 제한’ 등은 굳이 추가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그 자체만으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근본적인 활동을 심각하게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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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런데도 국내 기업이 속으로만 끙끙대야 하는 까닭은 이 문제가 이미 경제 사안을 넘어 정치 현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정치가 된 탓이다. 우리 기업은 우리 정치에 할 말을 못하고 우리 정치는 미국 정치에 할 말을 못하니 부당하고 불합리해도 말이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대통령 방미를 앞두고 목소리를 낸 건 그래서 반갑다.
대통령은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바 있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미 정상회담이 이 달 말로 예정돼 있다. 부디 실속을 챙기기 바란다. 웃는 낯이되 숨긴 속셈은 제대로 간파하고 따질 건 따져 얻지는 못하더라도 뺏기지는 말아야 한다. 이미 우리 국가안보실을 도ㆍ감청했다는 의혹으로 시끄럽다. 호탕한 웃음으로 허세만 부리기에는 화나는 게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