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국내 기후 분야에서 첨단기술 산업은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인 철강, 정유, 석유화학, 시멘트 등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다. 물론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종의 경우 국내 대표적인 탄소 다배출 업종으로 분류되어 배출권거래제 등 탄소규제 하에 관리를 받아왔지만, 다른 전자와 컴퓨터, 정보통신 등 테크 기업들의 경우 국가 탄소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언론의 관심이 적었다. 이에 따라 기후 분야에서 관심을 받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후행동에 나서는 국내기업들의 리스트에서 첨단기술 기업을 찾기는 쉽지 않았으며, 이러한 기조는 글로벌 기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딜로이트는 첨단기술 산업이 어떤 산업보다도 가장 발 빠르게 기후행동에 나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딜로이트의 ‘2022 CxO 지속가능성 서베이’(CxO Sustainability survey)에 따르면 많은 기업들이 넷제로 달성을 사업 실행 시 주요한 사안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첨단기술 산업이 여타 산업에 비해 가장 높은 실행 의지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첨단기술 산업 군에서 '2030 넷제로' 달성 목표를 제시한 기업이 가장 많았다. (아래 그림1 참조)
또한 첨단기술 산업 임원들이 여타 산업에 비해 13% 높은 비율로 넷제로 목표달성을 시급한 사안으로 보고 있고, 넷제로 달성 목표를 미루거나 없다고 응답한 임원은 타 산업에 비해 24%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첨단기술 산업 리더들, 기후변화 직접 겪으며 경각심 고조...기후행동 의지 불태워
딜로이트 서베이 결과, 타 산업보다 첨단기술 산업에서 기후변화를 우려한다는 응답 비율이 높았고, 기후변화에 따른 영향을 경험했다는 비율도 높았다. (그림 2). 그리고 기후행동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유는 기후변화가 첨단기술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베이 결과 첨단기술 산업군에서 자사가 물과 에너지 등 자원 부족을 경험한 응답자는 37%에 달했고, 이는 8개월 전 응답 비율보다 8%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또 기후변화 완화에 비용에 부담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38%로 이전 응답 비율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그리고 기온상승, 홍수, 가뭄 및 해수면 상승 등 이상기후 현상으로 자사가 피해 등 영향을 받았다고 응답한 비율도 42%로 이전 조사보다 18%포인트 증가했다.
최근 지구 곳곳에서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극단적인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대형 산불과, 초강력 토네이도, 홍수와 태풍, 지진까지, 더 자주 그리고 더 큰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들이 입은 손실과 피해 규모도 적지 않다. 2021년에는 미국 텍사스를 강타한 극심한 겨울 폭풍으로 정전 사태가 수 일간 지속돼 대형 반도체 공장 3곳이 문을 닫아야 했다. 바로 다음해 여름인 2022년 7월 영국 런던에 기록적인 폭염이 닥쳐 구글(Google)과 오라클(Oracle)의 데이터 센터 두 곳에서 냉각 장치 장애로 클라우드 서비스가 중단된 적이 있다. 같은 해 8월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으로 전력난이 발생해 주요 테크 기업들에 전자제품 부품을 납품하는 공장의 생산이 중단된 바 있다.
자연재해가 빈번해지고 첨단 기술 산업군에 속한 기업들이 적지 않은 피해를 겪으면서 ‘기후변화는 실재하는 위협’ 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타 산업보다 첨단기술 산업 임원들이 기후변화 심각성과 기후행동 실행의지가 더 높게 나타난 이유다. 이해관계자들도 첨단기술 기업과 리더들의 즉각적인 기후행동 실행을 독려하고 있다. 투자자와 고객, 이사회뿐 아니라 규제 당국의 압력도 강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규제 당국은 온실가스 배출량과 환경 위험, 완화 조치 등에 대한 기업의 공시 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관계자들과 규제 당국의 기후행동 촉구 압력에 대해 첨단기술 산업 리더들 또한 즉각적인 기후 행동 추진의 계기로 삼고 있다.
2022년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즉각적인 기후행동으로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첨단기술 부문에서 가장 높았다. 10명 중 9명은 현재 추진중인 지속가능성 노력이 기후변화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 답했다. 또한 10명 중 8명은 즉각적인 기후행동 추진을 혁신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기후행동 노력이 자사의 브랜드 인지도 강화, 공급망 회복, 영업이익률 개선, 신사업기회 확보에 따른 신규매출 창출 등의 결과로 이어지고, 직원들의 사기 증진 및 투자자들의 이익과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특히 ▲지속가능성 담당 임원 직책 마련 ▲ 기후행동 교육 실시 ▲‘과학기반 탄소감축목표 이니셔티브’(Science-Based Targets Initiative, SBTi) 에 부합하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량 선언 등 이미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응답 비율도 첨단기술 부문이 가장 높았다.
2022년 8월 기준 SBTi 에 가입한 총 3545개 기업들 중 첨단기술 산업군에 속한 기업은 338개로 산업군 별 순위에서 2위(농업부문1위)를 차지했다. 또한 SBTi 에 가입한 첨단기술 산업군 기업 10개 중 4개가 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첨단기술 산업군이 타 산업보다 지속가능 노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2021년 조사에서도 시가총액 기준 ‘미국 TOP 10’ 기업 중 5개 기업이 넷제로 목표 달성 시한을 두고 있고 모두 첨단기술 산업군에 속한 대기업이었다. 그리고 2021년 청정 에너지 구매 계약 중 첨단기술 산업군 대기업들이 체결한 계약이 절반 이상이다. 일부 대기업들은 기후변화 공시 의무화에 오히려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첨단기술 산업군 기업들이 지속가능성 실행에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첨단기술 산업군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3%를 차지하고, 디바이스 생산과 서비스 운영 과정에서 소비되는 에너지가 상당하다. 그리고 수십억 개 이상의 기기들은 전 세계에서 상호 연결되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이를 지원하는 데이터 센터 요구도 늘어나 에너지 소비량 증가와 더불어 탄소가스 배출량도 동반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산업을 볼 때 첨단 기술 산업군은 타 산업 대비 탄소 배출량이 적으며, 이에 따라 탄소 감축에 유리한 입장이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제외한 다른 업종의 경우 탄소 배출이 대부분 전력사용으로 인한 간접배출에서 발생하므로, RE100(Renewable Energy 100)과 같은 신재생에너지 이니셔티브 실행을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탄소 감축을 달성할 수 있다. 결국 상대적으로 쉽게 탄소 감축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점을 기회로 활용해 기후행동에 앞장서는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전략적으로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첨단기술 산업의 파급 효과를 고려했을 때 그들의 기후변화 행동 노력은 산업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 감축 노력 강화 생태계 전반 에너지 전환 주도
첨단기술 대기업들은 전력원을 얻기 위해 전 세계 태양광 및 풍력 프로젝트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애플(Apple)의 경우 자사의 협력사들로 하여금 에너지전환을 유도하고, 소비자들의 참여 또한 높이겠다는 의도로 태양광 에너지 시설 투자를 지속해 가치사슬 전반의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에 아마존(Amazon) 가치사슬 중 배송 부분에 집중하고 있는데, 2030년까지 배송 물량의 절반을 탄소중립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고, 목표 달성의 일환으로 전기자전거와 전기차를 도입하고 배송기사가 직접 걸어서 배송하는 방식도 채택하고 있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Alphabet)은 2030년까지 항시 탄소제로 에너지로 운영한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지열발전 기술을 활용하거나 탄소제로 전력이 공급되는 지역에서 서비스를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일부 테크 리더들은 넷제로 선언을 통해 생태계 전반의 움직임을 촉발하기도 했다. 2019년 아마존(Amazon)과 글로벌 옵티미즘(Global Optimism)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후서약(Climate Pledge)’에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잇따라 참여하며 참여기업 수가 400개를 넘었다.
■순환경제 모델 도입로 제품 지속가능성 강화
일부 테크 기업들은 ▲제품 생산과정에서 재활용 자재 사용 확대 ▲수리 및 재활용의 용이성을 고려한 설계 ▲전자제품 순환경제 활성화 등을 통해 전자폐기물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미국 델(Dell)은 2020년에 20억 파운드 가량의 전자제품을 회수하고 1000만 파운드 규모의 재활용 재료를 새 제품 생산에 활용했다. 그리고 2030년까지는 모든 새 제품을 재생 또는 재활용 재료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최근 애플은 아이폰SE에 세계 최초로 저탄소 알루미늄을 사용한 바 있다.
▲기후변화 추적 및 완화기술 개발: 테크 기업들은 ▲고객사가 자사 클라우드 및 소프트웨어 사용으로 배출되는 탄소를 추적하는 툴을 출시하거나 ▲탄소 포집 기술에 투자하거나 ▲데이터 애널리틱스와 로봇 기술을 활용해 에너지 소비를 감축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후변화 대응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알파벳은 AI기업 딥마인드(DeepMind)를 활용해 자사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을 줄이고 풍력 시설의 전력 생산량을 예측한다. 그리고 환경 감시 위성, 사물인터넷(IoT), 데이터 애널리틱스, 블록체인, AI 기술 등을 활용해 건축, 제조, 농업의 효율성을 개선하고, 데이터센터 관리를 강화하며, 교통혼잡도를 줄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 과제: 글로벌 첨단기술 기업들이 기후 리더로서 전략적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아직 국내 첨단기술 기업들은 리더보다는 팔로워로서의 소극적 대응을 하고 있다. 네이버와 같은 IT기업이나 SK텔레콤, KT 등 통신기업들이 ESG 경영의 일환으로 탄소중립을 위한 목표와 전략을 수립한 바 있으나, 국내 기후행동 리더로서 시장 분위기를 조성하고 기후기술을 성장시키는 주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험으로부터 국내 첨단기술 기업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글로벌 기업들과 같이 상대적으로 탄소 감축이 용이하다는 점을 기회로 활용해 기후행동 리더로서 전략적 포지션을 구축하고 이를 비즈니스 기회로 확장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기업 사례에 비추어 봤을 때 국내 첨단기술 산업 리더들은 기후변화 과제를 해결을 위해서는 자사의 사업모델, 운영방식 그리고 제품과 서비스 전달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넷제로 목표 설정: 중요한 첫 단계는 넷제로 달성을 위한 계획과 일정을 명시하는 것이다. 외부 기관으로부터 탄소감축 목표를 검증받는 것도 바람직하다.
운영 및 지배구조 개선: 기후 이니셔티브를 주도할 고위급 직책을 마련하고 지속가능성 성과에 기반해 임원 성과급을 책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운영 및 지배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지배구조 개선 뿐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한 운영 프로세스 마련과 통제 방식 개선은 기후 관련 공시에 도움이 된다.
▲운영 및 생산 방식 전환: 운영과 생산 방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건물, 장비, 제조의 에너지 효율성을 개선하고, 지속가능 자재 및 원래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 직원 대상 에너지 전환 교육을 실시하고, 재생 에너지를 구입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품 포트폴리오 점검: 탄소 감축에 잠재력이 높은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 영국 통신사 보다폰(Vodafone)은 차량 관제(fleet management), 물류, 제조, 계량 등에 활용할 수 있는 IoT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2030년까지 고객사의 탄소 배출량을 총합 3500만 톤 줄인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이처럼 테크 기업들은 디지털 혁신을 통해 여타 산업의 탈탄소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
▲가치사슬 변화 주도: 첨단기술 산업의 탄소 배출량을 가치사슬 전반으로 확대하면 7배 증가한다. 테크 기업들은 자사 운영 방식 전환에 따른 탄소 배출량 감축에만 초점을 맞추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공급업체와 파트너사들도 지속가능성 기준을 따르도록 협력관계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모든 산업은 상호연결된 복잡한 넷제로 시스템으로 통합되고 있는 만큼 테크 기업들이 이처럼 통합적 시스템 접근법을 주도하면 더욱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국내 전통적인 탄소 다배출 기업들의 경우 사업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으로 인해 기후행동에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얼마 전 공개된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에서 산업부문의 감축목표가 낮춰진 것도 해당 기업들이 직면한 어려움 및 이에 따른 탄원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내부탄소가격 도입과 같은 선진체계 하에서 공격적인 탄소감축 시설 투자를 통해 실질적인 탄소 감축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탄소감축 성과들을 시장 장벽이자 무역 장벽으로 활용하기 위한 자국 정부 공조를 진행 중이다. 국내 기업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이유이면서,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에 기후행동 리더 기업이 필요한 이유다. 국내 첨단기술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 못지 않은 리더십으로 우리나라의 넷제로 달성 레이스에서 선두로 달려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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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ESG와 기후변화 분야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보유한 국내 유일의 공인회계사다. 특히 지속가능금융 전문가로서 국내 최초이자 국내 최다 ESG채권 인증 경험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3년에는 기후금융 분야 국가경제발전 기여 공로를 인정 받아 경제부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는 그린워싱 주의보, 기후변화와 비즈니스 전략, 기후변화와 금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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