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의 소아과 "병원 늘려봤자…의사가 없어요"

생활입력 :2023/02/26 13:56

온라인이슈팀

"어린이공공전문진료센터, 달빛어린이병원, 소아암 지방 거점병원을 늘리면 뭐 합니까? 환자를 돌볼 의사가 없으면 소용없죠."

"수가(진료비)를 약간 올리거나 일회성 예산 정도로는 어린이 의료 체계를 정상화 시키긴 힘듭니다. 응급·중증 어린이 환자 진료는 조만간 대가 끊길 겁니다."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달빛어린이병원은 평일에는 오후 11시, 휴일에는 오후 6시까지 어린이 환자들을 진료한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미즈아이달빛어린이병원. 2023.02.26.

정부가 지난 22일 붕괴 위기에 직면한 어린이 의료 체계를 살리기 위해 각종 대책을 쏟아냈지만 의료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인력과 재정 지원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며 말 뿐인 대책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26일 의료계에 따르면 어린이 의료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일할 의사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어린이공공전문진료센터, 달빛어린이병원, 소아암 지방 거점병원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증 어린이 환자를 담당하는 공공진료센터와 평일에는 오후 11시, 휴일에는 오후 6시까지 어린이 환자들을 진료하는 달빛어린이병원 모두 장시간 진료에 비해 보상은 부족해 지금도 일할 의사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국내 첫 공공 어린이 재활병원인 대전 공공 어린이 재활병원도 다음 달 개원을 앞두고 있지만 근무할 의사 7명을 아직 채우지 못했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A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장은 "현재 운영되는 달빛어린이병원들도 일반 소아청소년과(소청과) 의원보다 수가를 조금 더 얹어줬지만 젊은 의사들이 야간, 휴일 근무를 기피하면서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한 곳도 없다"고 지적했다.

모든 상급종합병원 응급실에 ‘소아응급 전담 전문의’ 배치를 의무화하는 방안은 추가 인력 투입이 없다면 실효성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부교수(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정책이사)는 "그나마 병원에 1명씩 남아 있는 소아암 전문의들이 결국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야 된다는 얘기인데, 인력 이탈의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24시간 소아 환자에 대응하는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도 적은 인력으로 운영되면 하나마나라는 지적도 있다. A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장은 "소아응급 전담 전문의를 1~2명 두는 것은 오히려 재정만 낭비하는 꼴"이라면서 "최소 7명 이상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뉴시스] 백동현 기자 = 지난 2021년 12월2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의료진이 음성 확인을 받은 보호자와 함께 코로나19 확진 어린이를 중환자실로 이송하고 있다.

어린이 의료 체계를 개선하려면 획기적인 재정 지원을 통해 만성화된 낮은 진료비를 인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진료비를 올려 일이 고된 만큼 충분히 보상해주면 전공의의 소청과 유입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이유다.

소청과 진료비는 30년 동안 묶여있어 전체 15개 진료과 중 가장 낮다. 2021년 의원급 의료기관(동네 병·의원) 기준 환자 1인당 평균 진료비는 1만7611원이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소청과는 10년 간 유일하게 진료비가 줄어든 과로 5년 간 동네 병의원 662곳이 폐업했다"면서 "건강보험 재정이 아닌 국가 재정을 투입해 적어도 대만 수준(6만원 정도)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응급실, 중환자실 진료는 전공의 의존도가 높아 유인책 마련이 시급하다. 전공의 부족으로 중증 어린이 환자가 응급 처치나 수술을 적시 또는 아예 받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조중범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대한소아중환자의학회 기획이사)는 "어린이 중환자 진료가 24시간 가능하려면 어린이 중환자를 전담하는 의사가 5~7명 필요하다"면서 "어린이 중환자 진료비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소아중환자실 전담 전문의 수를 늘리려면 진료비로 유도하는 것도 필요하다"면서 "1~2명만 근무하라고 하면 지원할 전문의가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근무가 가능한 5~7명 이상의 팀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윤추구가 불가피한 민간병원에 손해를 감수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의료의 본질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병원이 정부와 손발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 중환자는 시시각각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치료가 중요하다. 충분히 수련 받은 소아 전문의가 없다면 입원을 해도 좋은 치료 효과를 얻기 어렵다. 보통 소아중환자실에 근무하는 의사가 소아청소년 전문의와 중환자 전문의 자격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이유다.

대표적인 고난이도·고강도·고위험 어린이 진료 분야인 소아암도 진료비가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 부교수는 "최소 5배는 올라야 한다"면서 "진료과 특성을 감안한 특별 가산 수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 응급 의료 진료비도 대폭 인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부분의 대학병원은 소아심장·혈액종양 전문의 등이 없어 어린이 응급 환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A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장은 "아이 한명당 기본 5만 원 이상, 야간 10만 원 이상, 심야 15만 이상 정도로 진료비를 상향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대가 끊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일본 등 해외 사례는 어린이 의료 체계 개선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미국은 1985년 연방 정부법에 따라 매년 어린이 응급 의료 체계 지원금을 각 주에 나눠주고 있다. 1986년부터 매년 어린이 응급 의료 서비스(EMSC) 홈페이지에 연방정부 소아응급 재정 사용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미국과 달리 국내 어린이 응급의료 체계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는 미비한 실정이다. 지난해 2월 무소속 김홍걸 의원은 11명의 의원과 어린이 환자 전문응급의료센터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공동 발의했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일본 정부와 각 지방정부(현)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각 현의 현립 어린이병원과 거점소아암병원에 1년에 200억~300억여 원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다. 각 현립병원에서는 환자 수에 얽매이지 않고 인력, 시설, 장비를 갖추고 환자를 진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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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교수는 "일본의 10년 전 상황은 지금 우리와 많이 비슷했다"면서 "당시 일본에서는 국가가 엄마와 아이의 건강을 책임지는 국정철학이 생겼고, 이후 예산이나 인력지원이 자연스럽게 흘러가 너무 부럽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지역 거점 센터에 각각 100억 여 원의 운영비를 제공하면 가능할 것으로 추산된다.

제공=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