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삶의 이정표이자 동력이다. 꿈은 곧 미래의 삶이다. 꿈은 그래서 소중하다. 꿈은 사람마다 다르고 다른 만큼 다채롭다. 스타트업이 꾸는 꿈도 그럴 것이다. 소중하고 다채롭다. ‘이균성의 스타트업 스토리’는 누군가의 꿈 이야기다. 꿈꾸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른 꿈꾸는 사람을 소개하는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된다. [편집자주]
‘무어의 법칙’ 주검 위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다
어떤 법칙에는 시효(時效)가 있다. 시대에 따라 그것이 진실할 때도 있지만 진실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1965년에 만들어지고 1975년에 수정된 ‘무어의 법칙(Moore's Law)’도 그렇다. 반도체 용량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이 법칙은 이제 수명을 다 했다. 반도체가 너무 작아지고 넣어야 할 트랜지스터는 너무 많아진 결과다. 하나의 법칙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 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조명현 세미파이브 대표는 ‘무어의 법칙’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질서를 목격하고 창업에 나선 사례다. 그 새로운 질서를 부르는 이름은 아직 없지만 그 질서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는 명확하다.
“무어의 법칙이 무너지면서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인텔 CPU 같은 범용 반도체가 급격히 위축되고, 애플의 자체 칩 같은 전용 반도체(Custom Silicom)가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무어의 법칙에서 벗어나 반도체를 ‘더 싸게 더 빠르게’ 개발해야 한다는 숙제가 많은 기업에 주어진 것이죠.”
조 대표는 무어의 법칙 주검 위에서 새 씨를 뿌릴 공간을 찾아낸 것이다.
■ 전자기기가 2년마다 혁신했던 이유
1990년대말 이후 PC를 비롯한 전자기기는 대개 2년마다 새로운 제품으로 바뀐다. 기기를 만드는 기업은 다 다른데 제품 혁신의 주기는 비슷했다는 뜻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진정한 혁신의 주체는 기기 제조업체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사실 전자기기의 혁신은 외양이 아니라 반도체의 혁신이었기 때문이다.
인텔 CPU가 업그레이드 돼야 PC도 성능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적용되는 게 바로 무어의 법칙이었고, 대부분의 전자기기는 이 법칙에 의존해 개발 로드맵을 짰다. 똑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제조업체에서 새로운 PC 제품이 쏟아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혁신의 주체는 인텔이었다.
■ 모바일 시대 무너지는 무어의 법칙
아이폰이 나오고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서 ‘무어의 법칙’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폰이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되면서 반도체는 더 작아져야 하지만 집어넣어야 할 트랜지스터는 더 많아지면서 이 법칙이 잘 작동하지 않은 것. 특히 애플은 아이폰을 처음 출시할 때부터 자체 칩을 개발해 탑재하기 시작했다. 또 시간이 지나고 스마트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품 혁신 주기도 2년이 아니라 1년으로 더욱 짧아졌다. 애플의 칩이 성공하면서 지금은 대부분의 테크 리딩기업들도 자체 칩을 개발하고 있다.
“애플 테슬라 아마존 등은 이미 세계적인 팹리스(제조공장을 갖지 않은 반도체 설계 기업)가 됐습니다. 각 기업마다 스스로 혁신의 주체가 돼야 하고, 혁신이 반도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테크 리딩 기업이라면 이제 전용반도체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마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하게 될 겁니다.”
■ 보스턴컬설팅에서 반도체 시장 격변을 목격하다
조명현 대표는 반도체 전문가다.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반도체 설계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후에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들어가 많은 반도체 기업의 전략을 직접 들여다봤다. 반도체 시장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 생생히 목격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크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기존에는 인텔 등 극소수 팹리스가 시장을 장악했지만, 애플 테슬라 아마존을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은 거의 모두가 자체 반도체를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 흐름은 더욱 강해지고 있고,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어요.”
■ “더 싸게 더 빨리 개발할 환경이 필요하다”
조 대표가 창업에 나선 것은 그 변화 속에서 공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직접 개발하려는 기업은 늘어나고 있지만 실제로 개발할 때는 난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비용과 시간.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것을 시장에 실제로 적용하려면 타이밍을 맞춰야 하고 투자한 비용을 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가늠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어서 개발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도체 개발에 비용과 시간을 개선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되는 거지요.”
세미파이브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조 대표는 그것을 ‘디자인 플랫폼’이라 부른다.
■ 대만 TSMC가 만든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지금의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시장 생태계를 만든 사람은 대만의 파운드리 회사 TSMC를 창업한 장중머우(張忠謀·모리스 창)다.
TSMC 이전만해도 반도체 기업은 설계부터 제조와 판매 등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공정은 아무나 뛰어들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최첨단 공정을 고도화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러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끝없이 투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모리스 창은 그래서 시스템 반도체 시장을 둘로 나누었다. 첨단 공정을 통해 제조만 해주는 파운드리와 제조는 하지 않고 설계와 판매를 맡은 팹리스.
그 결과 TSMC가 세계 1위 파운드리 회사가 됐고, 애플 AMD 엔비디아 퀄컴 미디어텍 브로드컴 등이 대표적인 팹리스 기업이다.
■ 파운드리와 팹리스를 이어주는 ‘디자인 하우스’
파운드리와 팹리스 사이에는 ‘디자인 하우스’라는 일종의 중개업체가 있다. 팹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로 상품 기획을 하고 스펙을 갖춰 반도체의 논리적인 설계 작업을 주로 한다면 디자인 하우스는 파운드리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공정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기반으로 실제 제품화를 위한 물리적 설계를 주로 한다. 또 제작을 위한 공정을 미리 확보하는 등 파운드리와 팹리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
대만의 TSMC는 VCA(Value Chain Alliance·가치 사슬 동맹)란 이름으로 이런 역할을 하는 디자인 하우스들과 제휴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이들을 DSP(디자인 솔루션 파트너)라 부른다. 이름은 다르지만 역할은 비슷하다.
세미파이브는 삼성전자의 DSP 가운데 하나다.
■“디자인 하우스가 아닌 디자인 플랫폼입니다”
조 대표는 그러나 세미파이브가 단순한 디자인 하우스가 아니라 디자인 플랫폼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조 대표가 보기에 디자인 하우스와 디자인 플랫폼은 큰 차이가 있다. 디자인 하우스는 팹리스의 논리설계를 파운드리에 맞는 물리설계로 대체하는 게 주요 경쟁력이다. 논리설계가 주력 서비스는 아닌 셈이다.
“2018년부터 준비해 2019년에 창업할 때 우리는 디자인 플랫폼을 주장했습니다. 또 하나의 디자인 하우스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전용반도체 시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이 필요하고 그게 디자인 플랫폼이라 본 것입니다. 디자인 하우스와 달리 논리설계까지 하는 이유이죠.”
세미파이브 핵심 경쟁력은 그래서 각종 영역의 반도체 논리설계를 모듈로 만들어 재사용할 수 있게 하고, 이 모듈을 통합한 설계를 가능한 한 자동화하는 것이다. 이유는 ‘더 싸고 더 빠르게’ 반도체를 개발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무어의 법칙 주검 위에 필 반도체 혁신은 ‘더 싸고 더 빠른 개발’이기 때문이다.
■“전용 반도체의 글로벌 허브가 되겠습니다”
“New Global Hub of Custom Silicom"
조 대표와 세미파이브 꿈은 그래서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조 대표는 그 비전을 ‘설계의 파운드리化’란 말로도 표현했다. 모리스 창의 파운드리 모델이 “너희가 설계한 모든 반도체를 우리가 만들어준다”는 개념이라면, ‘설계의 파운드리化’는 “너희의 모든 반도체 아이디어는 우리 플랫폼 위에서 설계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는 팹리스의 문턱을 지금보다 훨씬 더 낮추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메모리 중심의 한국 반도체 산업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확대 및 팹리스 업체 육성이라고 한다면, 세미파이브는 삼성전자와 함께 그 최전선에 있는 셈이다. 세미파이브가 곧 한국 반도체의 미래이다.
■설립 4년째지만 4개 기업 인수하며 공격 행보
꿈이 적지 않은 만큼 행보도 상당히 공격적이다.
세이파이브는 2019년 설립된 4년차 기업이지만 이미 국내 디자인 하우스 3곳을 흡수 합병했으며 미국 반도체 설계 IP업체 한 곳도 인수했다.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서 1700억 원을 투자 받았고, 작년 매출은 700~800억 원대로 창업 3년 만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내년에는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 행보와 투자가 모험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확실한 길’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지금은 임직원과 투자자분들도 대부분 공감해주시고요. ‘디자인 플랫폼’은 반도체 시장의 필연적인 비즈니스라는 생각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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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어의 법칙의 주검 위에 피어난 확실한 길이자 기회인 셈이다.
덧붙이는 말씀: 조명현 세미파이브 대표가 다음 인터뷰 대상으로 소개한 사람은 에이지테크 기업 주식회사 데카르트의 이제빈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