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낮은 행복지수와 손흥민의 행복축구

[이균성의 溫技] 성공보다 성장, 그래서 행복

데스크 칼럼입력 :2022/12/15 10:37    수정: 2023/01/05 16:34

스페인의 마라토너 이반 페르난데스 아나야는 2012년 12월 자국에서 열린 크로스컨트리 경기에 출전했다. 이날 경기에서 아나야는 결승점에 이를 때까지 단 한 명의 선수에게 계속 뒤처지고 있었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케냐의 아벨 무타이였다. 그런데 결승점을 코앞에 두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타이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이미 결승점을 통과한 것으로 착각해 생긴 일이다.

안타까워하던 관중들이 결승점이 그곳이 아니니 조금 더 달려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무타이는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결승점을 통과하지 않은 채 경기를 끝내려는 듯 보였다. 엉뚱하게 아나야가 1위를 할 수도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그러나 아나야는 무타이를 추월하지 않고 그의 뒤에서 손짓으로 결승점까지 더 가도록 안내했다. 아나야는 그렇게 무타이가 1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줬다.

축구선수 손흥민의 부친인 손웅정이 쓴 책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이 이야기를 접했다. 더 감동적인 건 아나야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다. “그가 이기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우승했다 해도 얻는 게 무엇이겠느냐. 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생각하시겠냐?” 손웅정은 이 장면에서 아나야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 했다. 축구 지도자이자 부모로서 아나야 어머니처럼 되고 싶었던 것.

[서울=뉴시스] '유퀴즈' 손웅정. 2022.12.14. (사진 = tvN 캡처)

손웅정은 손흥민이 아나야 같은 사람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손흥민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고 마침내 월드클래스가 된 것으로 보아 손웅정은 카리스마 넘치는 조련사였을 것으로 짐작됐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그는 조련사라기보다 뛰어난 교육자이자 훌륭한 부모였다. 또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끝없이 탐구하는 철학자였다.

13일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는 역시 형편없었다. 경제 규모는 세계 12위까지 성장했지만 2019~2021년 한국의 행복지수는 5.935점으로 조사 대상 146개국 가운데 59위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말 한국방정환재단이 공개한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조사 대상인 OECD 22개국 중 꼴찌였다. 사교육 광풍과 물질 우선주의가 아이들을 벼랑으로 몰고 있다.

이 조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묻는 질문에 돈·성적·자격증 등의 물질적인 가치를 꼽은 아이들이 38.6%로 가장 많았다는 사실이다. 손웅정의 책은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주옥같은 문장들을 선사한다. “아이들의 일에 실패란 없다. 오직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당장의 성적에 갈급하다보면 성장을 위한 소중한 경험을 실패로 낙인찍을 수도 있다.

손웅정이나 손흥민이 축구를 한 까닭은 그것을 할 때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손웅정은 그러나 축구가 즐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됐다. 오직 승패만 따져야 하는 현실이 힘들었고, 부상으로 28세에 은퇴해야 했다. 손흥민이 축구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힘들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그래도 하겠냐고 반복해 물었다. 손흥민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러면 해보자” 할 수밖에 없었다.

손웅정은 그러나 손흥민이 자신과 다른 축구를 하게 되기를 원했다. 한 마디로 ‘행복축구’다.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오히려 괴로워진다면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의 성적보다 길게 보고 기본을 다지는 데 충실해야 하며, 성공을 생각하지 말고 하루하루 더 발전하는 성장을 고민하고, 연습은 즐겁게 하고 경기는 욕심 없이 해야 한다. 특히 축구보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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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웅정은 손흥민이 행복축구를 할 수 있게 하려고 자신부터 바꿨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러 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한 서산대사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고 겸손하고 감사하며 욕심을 버리는 자세. 그러기 위해 그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1년에 100여 권의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은 반드시 노트에 옮겨서 읽고 또 읽었다. 집에 불이 날 때 들고 나갈 단 하나가 있다면 그 독서노트라 한다.

책을 통해 그는 축구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스포츠맨십의 핵심이며, 상대가 쓰러지면 아무리 좋은 골 찬스여도 공을 밖으로 차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일시적인 성공보다 지속적인 성장이 더 행복한 일임을 알게 됐다. 아나야가 유혹의 순간에 어머니를 생각했듯 손흥민은 그런 찰나에 아빠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