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서칼럼'은 IT를 기반으로 자유롭게 일하는 21세기형 전문가를 지칭하는 ‘이랜서’(e-Lancer)들이 21세기형 일과 생활에 대한 인사이트와 노하우를 공유하는 장 입니다.
편견은 정말 못 말린다. ‘공대나 자연대를 나온 사람, 엔지니어, 개발자는 인문학 책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공대 출신은 글을 잘 못 쓴다’는 편견도 꽤 널리 퍼져있다. 내 경험은 전혀 다르다. 연구실이 내 옆방이었던 컴퓨터공학과 출신 여교수는 시를 썼다. 그녀는 가끔 시어로 내게 말을 건내곤 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내 형은 나보다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 내가 학부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그는 내게 “그 책에서 그렇게 말하던데 그거 역사적 사실 맞아?”하고 묻곤 했다. 그 여교수는 나보다 시를 잘 썼고, 내 친형은 나보다 역사적 사실을 더 많이 꿰고 있었다. 그러니 이과 계통의 사람들이 문과 계통의 사람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별로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예외가 너무 많다.
예외가 많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편견을 깨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 개발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성공한 이과생들은 대부분 인문학적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과학을 수단으로 삼되 인생관, 창조적 발상 등은 인문학적 소양으로 커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인문학적인 이과생들이 역설적으로 성공확률이 높다는 가정도 해봄 직하다.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개발하는 시스템에 영혼을 불어넣으려 노력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깊이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며, 깊이 있는 생각이 그 과학적 사고와 방법에 자기다운 창조성을 더해준다. 반복되는 지루한 노동을 하면서도 의미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기에 열정적 몰입도 가능하다. 무료한 반복 노동조차 의미 있는 일로 만들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사람들이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안젤라 더크워스가 쓴 '그릿'이라는 책을 보면 벽돌을 쌓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뭘 하고 계십니까”하고 물으니 첫 번째 사람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두 번째 사람은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각각 노동, 직업, 천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동을 천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또는 천직에 해당하는 일을 선택해서, 먹고살기 위한 노동에서 자신을 구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문학은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 하고, 현재 하는 일에 의미 부여를 하도록 이끌어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천직을 수행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것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노동, 나의 전문성을 보다 나답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인문학적 인생관과 깊이 있는 사고,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에 더해 공학적 전문 기술을 겸비한 사람을 상상해보라. 기술만 있는 기술자, 상상력이 취약한 과학지상주의자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인문학과 친하려면 말 그대로 편견을 깨야 한다. ‘이공계통 사람들은 인문학 책을 안 읽고 글도 잘 쓰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는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낯섦을 뛰어넘으려는 용기와 작은 노력 정도는 전제되어야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에 세 가지는 꼭 권하고 싶다. 하나는 인문학 책 만나기다. 그냥 아무 책이나 사서 읽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도서관에 가서 인생관과 관련한 인문학 책 가운데 아주 쉽게 읽히는 책 서너 권을 빌리고 이중 제일 쉬운 책을 골라 완독을 한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 책과 친해지기 시작하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과 계통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베스트셀러인 '미움 받을 용기'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둘째,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대화하기다. 말을 해보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과감하게 책의 내용을 대화하고 이를 시도해보기 바란다. 말은 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과학과 공학만 언급되는 대화 속에 인문학적 향취를 더해보는 과감한 시도를 꼭 해보면 좋겠다.
셋째, 글쓰기다. 글을 써오지 않은 사람들은 펜이 삽자루보다 무겁게 느껴질지 모른다. 뇌 회로가 막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매일 자기 전에 20분 글쓰기를 한다든지 뭔가 루틴을 만들어 글쓰기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 루틴에 의한 반복만이 뇌 회로를 뚫어준다. 글쓰기야말로 깊이 있는 생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유럽, 특히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이과, 문과 할 것 없이 어릴 적부터 철학을 가르친다. 프랑스의 수능이라 불리는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에서 철학은 필수다. 일반계열 뿐만 아니리 기술계열에도 매년 4개 문항의 철학문제가 출제된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인가?” “기술은 우리를 자연에서 자유롭게 하는가?” 등의 문제가 출제되며 때로는 프로이트의 저술에서 뽑은 지문에 답해야 한다.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깊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여기 있지 않을까? 공교육에서 배우지 못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우리 스스로 독서와 말하기, 글쓰기를 통해 구멍 난 부분을 메워야 하지 않을까. 깊이 있고 의미 있으며 멋진 삶, 그것을 보장하는 인문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필자 약력
△명지대 명예교수, 인문 콘텐츠 크리에이터, 교육컨설턴트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1999~2022)
△대통령 비서실 업무및기록혁신TF 자문위원장(2004~2006)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위원(2005~2008)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 원장(2008~2022)
△한국기록학회 회장(2020~2021)
△유튜브 채널 김교수의 세 가지 크리에이터(2020~현재)
△아이캔유튜브대학 학장(2021~현재)
△(주)문화제작소 가능성들 대표(2022~현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