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 서울 강남에 있는 한 호텔의 지하 1층. 제목에 ‘혁신’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는 어느 상(賞)에 대한 시상식장. 혁신상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시작은 평범했고, 심하게 말하면 지루할 것이 뻔해보였다. 정면에 단상이 있고, 방송사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으며, 식장에는 7~8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원탁 10여개가 놓여있다. 원탁은 단상 앞쪽부터 참여자의 등급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였다.
식순에 따라, 주최 측 대표자 인사말과 한 국회의원의 축사 그리고 심사 대표자의 심사평이 이어졌다. 시상 기관은 여럿이었다. 시상 기관이 서너 번 바뀔 때까지만 해도 이 시상식은 매년 이맘 때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느 시상식과 하나도 다를 것 없이 식상했다. 분위기가 일순간 바뀐 것은 네댓 번째로 올라온 시상자 덕분. 어느 기관의 과장급 공무원이었고, 나이보다는 젊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이 시상자는 수상자에게 상장과 트로피를 전달한 뒤 느닷없이 “OOOO, 축하합니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순간 장내에 정적이 흐르더니(사고가 난 게 아닌가, 하는 긴장된 감정 상태로), 잠시 뒤 한 쪽에서 짧은 폭소가 터졌고(사고가 아님을 알고 이완된 마음으로), 그러다가 큰 박수 소리로 이어졌다. 그의 퍼포먼스는 원래 행사 계획에는 없었을 돌발행동이었지만 참석자 모두를 시상식에 집중시켰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상자가 11명의 수상자에게 시상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참석자 모두는 아마도 궁금해 했을 듯하다. 11명 모두에게 저런 퍼포먼스를 계속 보여줄까, 아니면 한 번 보여줬으니 나머지는 전에 시상한 사람들처럼 관례적인 형태로 진행할까. 퍼포먼스는 계속됐다. 달라진 것은 목소리였다. 혼자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합니다”는 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떨리기까지 해보였다.
그의 퍼포먼스에 대해 칼럼을 써보기로 한 것은 이거야 말로 ‘시상(施賞)의 전복(顚覆)’이라 부를 만 하며 ‘작은 혁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상의 시(施)는 ‘베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린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수상자는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대개의 시상식에서 시상자는 근엄한 척하고 수상자는 허리를 숙이는 게 그 탓일지 모른다.
이 시상자는 그러나 전혀 근엄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상을 받은 학생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크게 기뻐하고 목소리가 떨릴 만큼 엄청 큰 목소리로 축하했다. 진심이 저절로 우러났으며, 심지어는 너무 기뻐서 동동 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시상자에 앞서 시상자로 나서면서 지금까지 봐왔던 시상 장면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조금이라도 더 엄숙한 자세를 취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이 시상자가 매너리즘에 빠진 시상을 전복시키며 작은 혁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혼자만의 분석이기는 하지만, 종교 사상가인 마르틴 부버가 그의 대표작인 ‘나와 너’에서 말한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듯하다. 부버는 그 책을 통해 세상에는 '나와 너'(ICH-DU)의 관계와 '나와 그것'(ICH-ES)의 관계가 존재하는데,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와 너’의 관계는 나의 밖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나와 같은 존재로 여겨 결국 ‘우리’가 되게 하는 관계라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나의 밖의 모든 존재를 나의 대상으로 여기려는 성향을 말한다. 이 시상자가 상을 받은 학생의 어머니처럼 깡충깡충 뛸 듯이 기뻐하며 시상한 것은 그 점에서 연기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온 진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상 자체보다 수상자의 땀에 공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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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반응은 어쩌면 그런 이유로 상을 받을 만큼 우수한 자에게만 쏟아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수하기 때문에 축하한 게 아니라 그보다는 늘 새롭게 변하려 하고 그래서 더 풍부해지려는 모든 인간의 땀에 바치는 헌사였을 수 있다. 시상식 후 옆자리에 앉아 같이 오찬을 하게 된 한 수상자는 그 퍼포먼스에 대해 “신선하다기보다는 충격적이었다”며 “아마 평생 다시는 못 볼 장면”이라고 말했다.
그 수상자도 어쩌면 그 시상자의 진심을 진심으로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