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격침시킨 AI 판독, 축구 흐름도 바꿀까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월드컵 최대 변수로 떠오른 SAOT

데스크 칼럼입력 :2022/11/23 14:47    수정: 2022/11/23 16:02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에르네스트 메소니에(Ernest Meissonier)란 화가가 있었다. 1891년 사망한 그는 한 때 당대 최고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질주하는 말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런 장기가 잘 발휘된 작품이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한 ‘1817, 프리틀란트’ 다.

이 작품은 말의 세밀한 근육 움직임까지 정밀하게 포착했다. 인간의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동작까지 잡아낸 그의 재능에 당대 많은 화가들도 존경을 표했다.

에르네스트 메소니에의 대표작 '1817, 프리틀란트'

그 시절 함께 활동했던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우리 시대 최고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웠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메소니에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은 그 무렵 막 등장한 사진기였다. 고속 사진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인간의 눈으로 포착하기 힘든 세밀한 움직임까지 잡아내게 됐다.

미국 사진사 에드워드 머이브리지는 달리는 말을 연속 사진으로 촬영했다. 이 사진은 메소니에의 눈이 정말 정확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줬다. 하지만 그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메소니에의 눈으로는 도저히 잡아내기 힘든 섬세한 모습까지 쉽게 담아냈다. 사진기의 등장과 함께 ‘당대 최고’란 찬사를 받았던 메소니에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더 이상 ‘달리는 말’을 그리지 않았다.

사진기는 메소니에만 몰락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유럽 화단을 지배했던 사실주의 장르가 급속도로 몰락했다. 대신 순간의 색채와 질감, 빛에 초점을 맞춘 인상파가 등장했다. 미술의 흐름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한 때 메소니에를 존경하고 경탄했던 들라크르와는 인상파 대표 화가로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반면 메소니에는 쓸쓸하게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기술 발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역사 속의 패자가 됐다. 

■ 반자동 오프사이드 기술, 아르헨티나 감각 축구에 비수 꽂아 

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 미첼 스티븐스의 ‘비욘드 뉴스’에 나오는 얘기다. 스티븐스는 단순 사실 전달보다 분석과 해석에 초점을 맞춘 ‘지혜의 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메소니에 사례를 소개했다.

하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22일 밤 중계된 아르헨티나와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면서, 메소니에를 떠올렸다. 새로운 기술이 기존 강자의 장점을 무력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월드컵 역사상 대표적인 ‘언더독의 반란’으로 꼽히는 어제 경기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는 새롭게 도입된 ‘반자동 오프사이드 기술(SAOT)’을 잘 활용했다. 일자 라인을 형성한 포백들이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아르헨티나의 강점인 공간 침투를 무력화시켰다.

2일 오후(현지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 아르헨티나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에서 2대1 역전승을 거둔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2022.11.22/뉴스1 © News1 이동해 기자

이날 아르헨티나는 비디오 판독(VAR) 덕분에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리오넬 메시가 가볍게 차 넣으면서 1대 0 리드. 경기 초반 선취골이 나오자 예상대로 아르헨티나가 무난하게 승리할 것이란 전망이 그대로 실현되는 듯 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특유의 전방 침투를 통해 사우디 골문을 위협했다. 전반 21분부터 37분 사이에 세 번이나 사우디 골망을 갈랐다. 하지만 그 때마다 SAOT의 정교한 판독에 걸리면서 연이어 노골이 선언됐다.

특히 전반 27분 킬패스를 받은 라우타로가 넣었던 골은 SAOT가 아니면 오프사이드를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정교했다.

전반 27분 아르헨티나의 킬패스가 들어가던 장면. 리오넬 메시(가운데)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서 있는 가운데 라우타로가 수비수 뒤에서 침투하고 있다. (사진=MBC 중계화면 캡처)
라우타로가 수비수를 제치고 단독 찬스를 만들기 직전 장면. 메시는 확실한 오프사이드 위치에 서 있다. (사진=MBC 중계화면 캡처)

중계화면으로 자세히 보면 메시가 확실한 오프사이드 위치에 서 있는 가운데 라우타로는 수비수 뒤에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TV 중계를 지켜보던 나는 같이 보고 있던 딸에게 “메시가 공을 잡았으면 오프사이드였는데, 뒤에서 뛰어들어 오던 선수가 잡았기 때문에 괜찮은 거야”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골도 오프사이드로 판명됐다. SAOT 판독 결과 킬패스를 하는 순간 라우타로의 어깨가 사우디 수비수 보다 미세하게 앞서 있는 것이 확인됐다.

SAOT 판독 결과 라우타로의 어깨가 사우디 수비수보다 살짝 앞서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사진=FIFA)

아르헨티나 축구는 정교하다. 특히 메시가 찔러주는 킬패스는 자로 잰듯 정확하게 배달된다. 메시부터 시작되는 아르헨티나의 중앙 침투 공격을 보고 있노라면, 정교하게 조립된 전자기기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미세한 움직임으로 수비수와 심판을 교란시키는 능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전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수비수와 동일선상에 있을 경우엔 오프사이드가 아니다’는 전통적인 판정 기준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세 차례 노골이 선언되고 난 뒤 특유의 중앙침투 작전이 무력화됐다. 후반전엔 계속 측면을 고집하다가 결국 대회 최대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 AI와 빅데이터, 이젠 스포츠 패러다임까지 바꿀까 

최근 몇 년 사이에 전 세계 주요 스포츠에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 빠르게 접목되고 있다. 미국 프로야구는 비디오 판독에 이어 AI 심판 도입까지 고민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경기 양상까지 바꿔놓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선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고수하던 크리스 데이비스 같은 좌타 거포들이 몰락했다. 류현진과 함께 뛰었던 유격수 코리 시거도 빅데이터 분석의 희생양이다.

그 동안 병살 플레이 때 유격수나 2루수가 2루 베이스를 슬쩍 스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아웃으로 인정해줬다. 도루할 때 잠깐 베이스 위에 몸이 떠있는 건 그냥 묵인해줬다. 하지만 이젠 백분의 1초의 오차만 있어도 아웃 판정을 받게 된다.

각 팀들은 이런 변화에 맞춰 최적의 선수를 선발하고, 또 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주목 받은 반자동 오프사이드 기술(SAOT)

카타르 월드컵에서 처음 실전 투입된 SAOT 역시 단순히 한 두 경기 승패를 가르는 이상의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특히 아르헨티나처럼 정교한 킬 패스를 기반으로 한 공간 침투에 강점이 있는 팀들은 SAOT의 정교한 판정에 좀 더 세밀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 ‘골라인 기술’을 처음 접목하면서 판정 혁신을 꾀했다. 이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는 비디오 판독(VAR)이 적용됐다. 두 기술은 ‘인간의 한계’를 메워줄 판정 기술로 각광을 받았다.

이번 대회에 처음 적용된 SAOT는 VAR에서 한 발 더 나간 기술이다. 이 기술엔 축구 경기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야기한 오프사이드 판정을 둘러싼 시비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야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기술 도입의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클 것 같다. 어쩌면 축구 경기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교한 차이까지 잡아내는 고급 기술 앞에 ‘감각 축구’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쩌면 머지 않은 장래에 ‘로봇 심판’이 월드컵 경기 판정을 담당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덧글)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판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중간 중간에 계속 흐름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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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이저리그는 내년 시즌부터 수비 시프트를 사실상 금지하기로 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경기시간 단축’이다. 하지만 수비 시프트가 경기 재미를 저해한다는 비판도 감안한 조치라고 봐야 한다. 스포츠 경기가 점차 전자오락화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2. 사진기의 등장 이후 '사실의 재현'에 주력했던 사실파 화풍이 몰락했다. SAOT로 대표되는 AI 기술은 현대 축구의 어떤 강점을 무력화시킬까? 이번 월드컵에선 이 질문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아르헨티나의 패배만으로 변화 흐름을 요약해버리는 건 성급할 터이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