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안전모 끈을 조이고 안전화를 신고 차에 올랐다. 채굴한 광석이 쌓인 무더기 사이를 지나 입구에 들어섰다. 철창으로 문을 대신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롯데타워 높이보다 큰 600m 깊이의 땅 밑으로 내려갔다. 일반 승용 엘리베이터보다 4배 빠른 특수 엘리베이터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데는 2~3분 걸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인승 전기차를 타고 한참 더 이동했다. 양 옆으로 여러 실험 공간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간 터널이 등장했다. 철광 옆에 만들어진 이 지하 동굴에서 우주의 시작을 찾는 연구가 펼쳐진다.
이곳은 5일 준공한 한국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의 지하 실험 공간 '예미랩'이다. 우주의 기원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염원이 담긴 거대 연구 시설이다. 연구는 최신 연구개발 단지의 깔끔한 실험실이 아니라 강원도 정선 예미산 밑 철광 지하 1㎞ 터널에서 이뤄진다.
김영덕 IBS 지하실험연구단장은 예미랩 준공식을 앞둔 지난달 29일 현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예미랩에서 암흑물질 탐색과 중성미자 미방출 이중 베타 붕괴 현상을 주로 연구할 것"이라며 "이는 우주의 기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예미랩은 암흑물질 및 중성미자 관측 등 세계적 난제를 집중적으로 연구, 우주의 구조와 기원을 이해하기 위한 시설이다. 극히 짧고 드물게 일어나는 물리 현상을 놓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또렷이 보기 위해 모든 소음과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는 깊은 지하에 실험 공간을 마련했다.
■ 중성미자 성질 밝혀 우주 기원 찾는다
'중성미자 미방출 이중 베타 붕괴 연구(AMoRe)'는 우주를 이루는 입자 중 하나인 중성미자의 성질을 밝히려는 프로젝트다. 중성미자는 물리학의 '표준 모델'에서 물질을 구성하는 12개의 기본 입자 중 하나로 3 종류가 있는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중성미자의 정확한 질량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4번째 중성미자가 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며, 중성미자가 과연 '마요나라 페르미온'인지가 논란이다.
마요나라 페르미온은 입자와 반입자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입자를 말한다. 보통 입자는 입자와 반입자가 구분된다. 음의 극성을 가진 전자의 반입자는 양의 극성을 가진 양전자다. 반면,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에토레 마요나라가 그 존재를 예측한 마요나라 페르미온은 입자인 동시에 반입자다. 그는 중성미자가 마요나라 페르미온일 것으로 예측했다.
이중 베타 붕괴 현상의 반감기를 측정, 중성미자의 질량을 파악해 이를 확인하는 실험이 AMoRE다. 베타 붕괴는 양성자가 중성자로, 혹은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중성자나 양성자, 중성미자 입자가 하나씩 나온다. 이중 베타 붕괴는 드물게 이 과정이 두번 연속 일어나며 입자가 두 개씩 나오는 현상이다.
만약 중성미자가 입자인 동시에 반입자인 마요나라 페르미온이라면 이중 베타 붕괴가 일어날 때 나온 두 개의 중성미자가 서로 흡수해 결과적으로 중성미자가 나오지 않는 이중 베타 붕괴가 일어난다. 실제로 이 현상을 관측한다면 중성미자가 마요나라 페르미온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중성미자의 성질은 우주 초기 생성의 비밀을 이해할 열쇠다. 빅뱅 직후 우주엔 물질과 반물질이 함께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물질만 비대칭적으로 남아 현재의 우주를 구성했는지 설명하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
김영덕 단장은 "우주 초기에 중성미자가 많이 형성됐는데, 초기 중성미자는 반응이 워낙 약해 이후 관측된 바 없다"라며 "중성미자가 우주 초기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가 같은지 다른지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했다.
연구단은 이중 베타 붕괴가 비교적 잘 일어나는 몰리브덴-100의 고순도 결정을 200㎏까지 키워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 이휘소 박사가 예측한 우주 암흑물질 찾아낼 수 있을까?
암흑물질 탐색 연구(COSINE)는 우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 관측된 적은 없는 암흑물질을 찾는 연구다.
은하의 실제 움직임이나 운동 속도를 감안하면 우주의 질량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커야 한다.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을 거의 하지 않아 인간이 관측조차 하지 못 하는 무엇인가가 우주에 있다는 의미다. 우주에서 암흑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26.8%로 추정된다.
이러한 암흑물질의 후보로 몇 가지가 거론되는데 IBS는 이중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무거운 입자(WIMP)' 탐색에 도전한다. 재미 한인 과학자 고 이휘소 박사가 제안한 입자다. 고순도 아이오딘화나트륨(NaI) 결정으로 검출기를 만들어 우주에서 날아온 WIMP 입자가 원자핵에 충돌하는 순간을 관측한다는 목표다. NaI 결정을 기존 연구의 2배인 200㎏으로 늘이고, 향후 1톤까지 키울 계획이다.
이를 통해 작은 입자들을 뭉치게 해 최초의 별을 만드는 등 우주 탄생과 인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암흑물질의 정체를 찾는데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IBS 지하실험연구단이 찾는 중성미자나 암흑물질이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해 흔적을 남기는 현상은 극도로 드물게 일어난다. 검출기에 쓰일 결정의 순도와 크기를 키우고, 우주 방사선 등 다른 배경신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하 깊은 곳에 예미랩을 만든 이유다. 결정이 클수록, 잡음이 적을수록 찾고자 하는 현상을 관측할 확률은 커진다.
■ 1㎞ 지하에서 연구하는 이유
세계 각지에서 지하 실험 시설을 건설해 우주의 성질에 대한 연구에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1천 400m 지하에 구축된 세계 최대 지하 시설인 이탈리아 그랑사소국립연구소를 비롯해 미국의 샌포드 지하연구시설, 캐나다 서드베리 중성미자 관측소, 일본의 슈퍼 카미오칸데 등이 대표적 고심도 지하시설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2천 400m 지하에 진핑 지하실험실을 구축한다.
5년 간 197억원을 들여 구축한 예미랩은 면적 기준 세계 6위 수준이다. 예미산 정상에서 지하 실험 시설까지 깊이는 1㎞에 이른다. 예미산은 경사가 완만해 산 정상에 수직 방향으로 쏟아지는 우주선뿐 아니라 측면에서 접근하는 우주선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또 지하수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 물을 보관하고 퍼내는 시설 비용도 아꼈다. 터널 자체에서 나오는 방사능 수치도 슈퍼 카미오칸데에 비해 100분의 1 수준으로 낮았다. 박경순 IBS 책임기술원은 "기존 강원도 양양 지하 실험 시설을 대체할 입지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라며 "예미산 일대는 지하 실험 시설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말했다.
예미랩엔 AMoRe와 COSINE 실험 외에도 기상청이나 지질연, 경북대 등 다른 연구기관의 측정 및 실험 연구를 진행할 공간도 마련돼 있다. 미국 항공우주청은 600m 깊이의 엘리베이터를 이용, 자유낙하가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각 연구 공간은 관측을 방해하는 뮤온 입자 등의 외부 배경신호를 막기 위한 차폐 설비가 2중 3중으로 설치됐다. AMoRe 장비의 경우 검출 장비 외부를 납으로 차폐하고, 그 공간을 다시 차폐 시설로 막는다. 지하 1㎞ 밑까지 오는 길에 있는 암석도 물론 차폐 역할을 한다. 이재승 IBS 연구위원은 "지상에선 엄지 손톱만한 면적에 1분당 1만개의 뮤온이 검출되지만, 예미랩에선 10의 마이너스 8승 개만 검출된다"라고 말했다.
■ 노벨상의 꿈이 여기에서?
예미랩에는 앞으로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액체섬광물질(LSC) 실험을 위한 직경 20m, 높이 28m의 거대한 공동도 준비했다. 여기에는 3천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으며, 맞은편에는 중성미자 연구를 위한 소형 가속기도 설치된다.
예미랩 연구 프로젝트들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우주 생성의 비밀이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에 한걸음 더 가까와진다. 참여 연구자들에게 노벨상을 안길 수도 있는 연구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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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포드와 서드베리, 슈퍼 카미오칸데 등의 지하 실험 시설에선 이미 여러 건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성공하지 못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 그래서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 지 아는 것 역시 새로운 지식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