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시 패싱' 논란과 반도체 외교…어떻게 봐야 할까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칩4 동맹' 시대 대처법

데스크 칼럼입력 :2022/08/04 15:47    수정: 2022/08/04 18:49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요란하게 대만을 찾았던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의 한국 방문은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만에서 중국을 자극한 영향도 있겠지만, 우리 정부도 소극적으로 대응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런 부분이 살짝 아쉬웠다. 

그렇다고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만났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산 미군 공항 도착 때부터 '패싱 논란'을 야기한 것이 조금 아쉽다는 것이다. 좀 더 세련된 외교 전략이 필요했던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단순히 한미간 정치적 공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문제를 분석하는 것은 정치 전문가들의 몫이다. IT 기자가 어설프게 끼어들 쟁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간의 최근 갈등 국면에는 정치 문제만 걸려 있는 게 아니다. 요즘 두 나라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역은 오히려 ‘반도체’ 쪽이다. 그 부분을 좀 더 감안할 필요가 있지 않았냐는 의미다. 

김진표 국회의장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2.8.4/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 펠로시, 하원 반도체지원법 처리 직후 아시아 순방 의미심장

미국 의회는 최근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칩과 과학법’을 통과시켰다. ‘반도체칩과 과학법’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때 연방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골자다. 잡혀 있는 예산만 520억 달러(약 68조5천억원)에 이른다. 연방 보조금을 받은 업체는 ‘10년간 중국 투자 금지’란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노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법이다. 

낸시 펠로시 의장은 하원에서 반도체법을 통과시킨 직후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예사롭지 않은 행보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 압박은 '반도체칩과 과학법' 뿐만이 아니다. 칩4 동맹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미국은 한국, 대만, 일본 등과 반도체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연합군'인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중국은 '반도체연합군'의 주타깃 중 하나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낸시 펠로시의 행보를 한번 되짚어보자.

낸시 펠로시는 예상대로 3일 마크 리우 TSMC 회장과 전격 회동했다. 야후 파이낸스에 따르면 TSMC 회장 회동은 펠로시의 대만 공식 일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공식 일정은 차이잉원 총통, 차이치장 입법원 부원장 등 정관계 인사들과 회동 위주로 짜여 있었다.

하지만 펠로시 의장은 대만을 떠나기 직전 TSMC 회장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펠로시 의장은 TSMC 측에 ‘반도체 칩과 과학법’ 관련 설명을 하고 협조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칩4 동맹’ 역시 중요한 의제로 거론됐을 것이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오른쪽에서 4번째)이 대만 타이베이 쑹산공항에 착륙한 뒤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 (사진=펠로시 공식 트위터)

많은 언론들은 낸시 펠로시 의장의 아시아 순방을 정치적 쟁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펠로시 의장이 그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보여준 일관된 관심을 감안하면 당연한 관점이다.

하지만 ‘반도체 칩과 과학법’이 통과되고, 칩4 동맹이 본격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 대만, 한국, 일본을 연이어 방문하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펠로시 의장의 이번 한국, 일본, 대만 방문 목적 중엔 ‘반도체 외교’도 큰 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 칩4 문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논의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펠로시 의장의 행보를 다시 한번 따져보자. 펠로시는 대만에서 국가 총통과 최대 반도체 업체 회장을 연이어 만났다. 정치적 의제 뿐 아니라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반도체 동맹 관련 얘기가 깊이 있게 오갔을 가능성이 많다.

외신들은 펠로시의 일본 방문 일정 중에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조찬 일정이 포함돼 있다고 전하고 있다. 역시 다양한 정치적 의제와 함께 ‘칩4 동맹’을 비롯한 반도체 협력이 중요한 의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한국 정부의 ‘낸시 펠로시 패싱’이 아쉽게 느껴지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정치적 의제 뿐 아니라 반도체 협력 문제를 깊이 논의하기 위해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게 어땠겠냐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국이 주도하는 칩4 동맹은 한국 입장에서도 꽤 부담스러운 의제다. 무역 구조상 미국 뿐 아니라 중국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칩4 동맹'은 우리가 외면하기 힘든 제안이다. 

지디넷코리아가 국내 반도체 및 경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절대 다수가 우리나라가 칩4 동맹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지디넷코리아와 인터뷰에서 "미국은 반도체 설계 기술, 장비 뿐 아니라 퀄컴, 브로드컴 등 강력한 팹리스 기업들을 가지고 있고, 일본은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에 강하다"며 "최근 미국과 대만, 일본과 미국, 대만과 일본이 반도체 얼라이언스를 구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칩4 가입을 안 하면 외톨이가 될 확률이 높다”고 강조했다.

유재희 반도체공학회 부회장겸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의 의견도 새겨들을 부분이 많다. 

유 교수는 "국익을 위해 칩4 가입 조건을 유리하게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한 세대 지난 기술 등에 선택적 기술 이전 재량권을 제공하거나 한국과 미국 모두가 원하는 외국 기업의 중국 현지 반도체 공장 증설 제한을 완화 또는 중국 반도체 수출 제한을 완화하는 것을 미국에 적극 설득하고 중국에는 당근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초기 논의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우리 입장을 개진하고, 가입 효과를 극대화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미국 의전서열 3위 낸시 펠로시의 방한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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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낸시 펠로시가 미국 정부 대표 자격으로 방한한 것은 아니다. 반도체 사절단 대표도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반도체 공조 문제로 민감한 시기에 미국 의전 서열 3위인 거물급 정치인이 한국 땅을 밟았는데, 정부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실리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 지 잘 모르겠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