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칩4 동맹'과 한덕수 총리의 스탠스

[이균성의 溫技] 외교 묘수 찾을 수도

데스크 칼럼입력 :2022/07/28 14:32    수정: 2022/07/28 16:46

반도체 시장은 그야말로 ‘글로벌 전쟁터’다. 4차 산업혁명이 진전되면서 반도체가 석유처럼 경제를 좌지우지할 자원(資源)으로 인식되고, 그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 각국이 사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가 급속도로 전자화하면서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된 게 이 시장을 전쟁터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총을 든 전쟁 못잖게 이 문제가 각국의 국운을 가를 사안으로 커졌다.

우리나라한테는 그 중요성이 특히 크다. 반도체가 제1의 산업으로 부상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인데, 자칫하면 수십 년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는 마치 열강들의 등쌀에 몸살이 난 구한말 한반도 정세 같다. 그때와 달리 우리의 선택권이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현명하게 줄타기 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한덕수 국무총리

이 전쟁의 와중에서 우리 정부를 특히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미국이 제안한 '칩4'다. 칩4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일본 대만 등 동북아 3국에 제안한 것이다. 미국의 기술과 일본의 장비 그리고 한국과 대만의 제조 능력을 결합해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을 결성함으로써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다. 미국은 이 제안을 내놓으면서 각국 정부한테 8월말까지 답변을 요청한 상황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중국의 보복이 불을 보듯 뻔하고, 그렇다고 이를 거부할 경우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 급속히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시장을 가지고 있고 미국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로서는 그 어느 것을 포기하든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사안은 기술과 기업과 산업과 시장의 문제이고, 기업들의 자율적인 경영 판단에 따르게 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안이 각국의 정치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는 데 있다. 반도체 경쟁력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국운을 결정할 요소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패권을 노리는 G2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최전선이 돼버렸다. 기업은 벙어리 냉가슴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두 발로 서 있는데 양쪽에서 가랑이를 찢으려 하는 느낌입니다. 둘 중 한 쪽을 선택하라는 것은 왼 발이나 오른 발 중 하나만 가지라는 말과 같아요. 지금 상황은 두 발로 뛰어도 버거울 만큼 경쟁이 치열한데 한 발을 포기하라고 하면 죽으라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죠. 그런데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요.” 반도체 기업 임원의 말이다. 일선 전쟁터에 나서 총알받이 처지다.

상황은 쉽지 않아도, 그러나, 선택은 해야 한다. 기업과 학계 그리고 연구기관의 전문가 이야기를 두루 들어보면 “칩4 가입은 불가피하다”는 게 중론이다. 가입하지 않으면 미국의 기술과 일본의 장비에서 소외되거나 차별받을 가능성이 크고 그것은 중단기 시장(중국)을 지키느라 미래를 포기하는 일과 같다는 게 대체적 의견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보복을 어떻게 회피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발언이 그래서 주목된다. 그는 28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칩4는 꼭 중국을 배제하려는 게 아닐 수도 있으며, 중국이 주도하는 협정에도 가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말은 ‘칩4 동맹’이라는 난제를 슬기롭게 극복할 ‘외교적 패러다임의 전환’으로서 훌륭한 돌파구처럼 여겨진다. 글로벌 명분도 얻고 실리도 손상되지 않는 좋은 외교의 길을 찾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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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총리 발언은 우리 정부가 칩4 가입 목적을 ‘중국 죽이기’가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건’으로 분명히 못박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 목적만이 자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까지 고민하는 글로벌 지도자가 가질 수 있는 명분이다. 칩4 가입 목적이 그것이라면 중국이 주도하는 협정에 우리가 못 들어갈 이유도 없다. 우리 반도체 역량을 가능한 한 많은 곳과 나누는 게 더 좋기 때문이다.

중국이 칩4에 맞서 어떤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려 하는 지 아직 확인한 바는 없다. 또 우리 정부가 칩4 가입을 위해 미국과 어떤 논의를 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중국과는 어떤 외교적 교류를 하고 있는 지 아는 바도 없다. 다만 한 총리 발언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진 한국 반도체 산업에 가느다랗게 비친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면 정부가 이를 깊이 숙고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