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美보다 더 큰 화상전문병원…"우린 화상에 미친 사람들"

허준 한림대한강성심병원장 "민간이 맡는 공공영역, 보건당국 더 관심 가져야"

헬스케어입력 :2022/06/21 16:18    수정: 2022/06/21 16:27

허준 한림대 한강성심병원장은 화상외과 의사를 ‘살짝 미쳐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국내 유일 화상전문병원, 세계적인 수준의 화상외과를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늘어놓아도 모자랄 판인데 미쳐있다니!

그렇지만 허준 병원장의 말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축돼있다. 낮은 수가로 전공의 기피 1순위의 외과, 그중에서도 더 아랫단에 놓여있는 화상외과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열악하다. 그럼에도 그와 동료들은 굳이 고생길을 자처하고 있으니 미쳐있다고 할 수밖에.

말마따나 병원에서 24년간 일해온 허 병원장은 15년 동안 전공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짬밥’이 높은 그조차 한 달의 3분에 1은 당직으로 밤을 새워야 한다. 제주도를 포함해 땅끝마을에서도 화상 환자가 이송되지만 병원의 경영 사정은 좋지 않다. 조금 과장한다면 한림대의료원의 지원 없이는 언제 병원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다.

의료진이 열심히 일해도, 밀려드는 환자를 돌보느라 ‘열일’해도 점점 더 적자가 되는 기이한 시스템. 그것은 우리 의료체계가 가진 모순점일 것이다. 허 원장은 “공공성이 필요한 의료분야는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며 “진료과의 특수성을 인정한 수가 체계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달부터 임기를 시작한 허준 한림대한강성심병원장은 화상 분야의 특수성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진=김양균 기자)

■ 화상 환자 줄었다지만…일상 화상 사고 더 잦고 피해도 치명적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화상외과팀이 회식을 하러 갈 때면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식당의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불이 붙을라치면 의료진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화상 피해 환자를 오랜 기간 돌보다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다.

연간 병원의 화상외과에 입원하는 환자 수는 900명~1천명 수준. 타 질환도 그렇지만 화상은 특히 급성기가 중요하다. 과거보다 중화상 빈도는 줄었지만 일상에서 발생하는 화상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경화상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아선 안 된다. 일부 환자에서 계속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뜨거운 국에 손가락을 데인 이후 후유증으로 손가락 관절에 문제가 생겨 물건을 집거나 하는 등의 일상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도 부지기수.

허준 원장은 “화상 사고 이전에는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화상 사고를 당한 후에도 어디에서 치료받아야 하는지를 몰라 초기 치료 과정이 부적절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상 피해 이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합병증은 상당부분 발생한다”며 “화상은 대단히 넓은 영역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전했다. 허 원장은 계절별 화상 예방책과 응급처치법을 더 많이 알릴 생각이다.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사진=김양균 기자)

한림대한강성심병원은 미국 내 가장 큰 화상병원보다 규모면에서는 두 배 이상이다. 병원의 화상 분야의 임상 실력은 이미 전 세계 톱 수준이다. 

관련해 화상 분야의 특성상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발생 가능성이 높고, 피해도 더 크다. 때문에 한림대한강성심병원은 몽골·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 의료진과 교류를 해왔다. 진료 봉사를 위해 현지에 간 적도 수차례. 허 원장은 병원의 노하우를 현지로 파급시키고 싶다.

그러려면 현재보다 더 공고한 위치와 체계화된 시스템이 필요했다. 인력도 문제였다. 국내 화상 전문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국내에서 인력 확보도 필요했다. 그래서 허 원장은 지금보다 더 잘 디자인된 병원을 만들고 싶다. 그렇지만 그와 병원 구성원만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허 원장은 “제대로 디자인 되어서 체계화된다면 환자의 혜택도 더 많아질 것”이라면서도 “국가 운영 체계에서 화상은 낮게 대접받고 있는데 진료과의 특수성이 지금보다 더 고려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재활훈련을 받고 있는 화상환자의 모습. (사진=김양균 기자)

■ “답답하지만 그래도 난 화상외과 의사”

지금은 병원장까지 하고 있지만 허준 원장도 처음부터 화상외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임상의 말고 기초연구를 하고 싶었다. 해부학이나 법의학을 하고 싶었지만 장시간 현미경을 보는 게 그에겐 쥐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임상의로, 그럴 거면 외과를 하자고 했다. 화상외과를 선택한 것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가 화상외과에 전공의로 지원할 당시에도 화상외과는 인기가 없었다. 화상외과에 지원한 전공의는 그 한 명뿐이었다. 그렇게 얼결에 시작한 화상외과의로의 삶은 그의 나이 오십을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병원에서 허 원장은 아직 ‘주니어’ 취급을 받는다. 50대면 아직 펄펄 날 때라는 것. 그래서 일주일에 절반은 아직도 당직 근무로 밤을 샌다. 소신이나 사명감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단순하다. 환자가 덜 힘들면 기분이 좋고 일은 고되지만 재밌으면 그만이었다.

지난 2013년 문을 연 화상병원학교는 주로 소아청소년 화상 환자를 대상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병원내 학습기관이다. (사진=김양균 기자)

화상 피해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 없는 사람에게 더 취약하다. 경제사정이 안 좋은 환자에게 고비용의 치료를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화상에 대해 보건복지부·건강보험심사평가원·국민건강보험공단·식품의약품안전처·근로복지공단 등은 서로 다른 체계로 운영하는 탓에 화상 질병 분류도 기관마다 제각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체계화와 합리적 운영이 어려워진다. 병원 입장에서는 경영이 어려우니 비용은 더 비싸지고 환자 본인 부담은 커진다. 전국에 화상병원이 없거나 있어도 점차 줄어드는 이유다.

허 원장은 화상외과 분야의 특수성과 중요도에 비해 정책적 지원이 부족한 점은 늘 아쉽다. 그는 “한이 맺혔다”고 했다.

허 원장은 “각 지역에 화상전문병원이 있어야 하는데 의료체계의 한계로 외과계가 살아남기 어렵다”며 “외과계는 노동집약적 구조를 갖고 있어 거기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원만한 진료가 어렵고 환자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강조했다.

화상의학연구소에서는 화상과 관련한 의료기기, 약제 개발 등을 위한 연구가 한창이다. (사진=김양균 기자)

한편, 허준 병원장은 중앙대의대 졸업 후 지난 2002년 한림대한강성심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마쳤다. 이후 화상외과 임상과장 등을 거쳤다. 이밖에도 대한화상학회 이사장을 비롯해 대한외과학회·대한중환자의학회·대한창상학회·대한정맥경장영양학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달부터 임기를 시작한 허준 한림대 한강성심병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화상 특성화 진료 및 화상연구 역량 강화를 통한 대표 융합특성화센터 구축 ▲메타버스 가상병원 활성화를 통한 디지털 의료원 가속화 ▲전문간호 인력 등 의료 스페셜리스트 교육 개발·제도화 등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