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서울대병원 외과 한호성 교수는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칼잡이’다. 올해 소화기 복강경 및 내시경 수술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 앰배서더상을 수상했고, 앞서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복강경으로 간엽 절제술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의 수술을 배우려고 전 세계에서 연수도 쇄도하고 있다.
외과의사로 한 평생을 살아온 한 교수는 ‘디지털헬스케어연합포럼’의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외과의사가 디지털 헬스케어를?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 한 느낌도 들지만, 사실 그가 20년 넘게 디지털 헬스케어 영역의 연구와 인적 교류를 해온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의아함은 사라진다.
지난 2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한 교수를 만났다. 그는 기자에게 “디지털 헬스케어 안에는 빅데이터·메타버스·인공지능(AI)·블록체인·전자의무기록(EMR)·유전체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ICT 전문가나 말함직한 전문 용어를 술술 쏟아내는 한 교수를 보고 있자니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ICT 기술로 의료와 사회생활에 도움을 주는 환경을 만들자는 겁니다.”
■ ‘디지털 헬스케어’ 매개로 교수·기업 자유롭게 연결돼 협업
-어떤 계기로 디지털 헬스케어에 관심을 갖게 된 건가.
“지난 2002년 한일간 텔레메디슨(Telemidicine, 원격진료)이 추진되면서 국가 사이에 연구망을 통해 화상회의나 수술을 보고 싶다는 니즈가 많았다. 전 세계 의료기관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컨퍼런스를 하거나 수술 집도 과정을 보여줬다. 우리 의료의 선진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디지털 헬스케어의 개념이 생소해서 IT 분야 학자들과 자연스레 친분을 쌓게 됐다. 사물인터넷(IoT)을 거쳐 현재는 AI, 메타버스, 블록체인으로 넘어오면서 관련 연구도 계속했다.”
-디지털헬스케어연합포럼도 조직했는데.
“전자의무기록부(EMR)에 관심을 가진 의사들이 많아서 교류를 해왔다. 가령, 블록체인으로 의료 정보에 접속, EMR에 블록체인 기술이 도입되지 않겠는가. 의료정보가 외부에 나가질 못하니 개인에게 돌려줘서 어느 기관에 가서 진료를 받아도 언제든지 이전의 진료기록을 볼 수 있는 모델이다.
그런 연구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관련 기업들과 만나게 됐다. 대한의료정보학회에 몸담을 때에는 대다수 멤버가 교수였다. 때문에 기업가도 함께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봤다. 디지털헬스케어연합포럼은 5년 전 산업계와 교수, 의사 등이 모여 창립했다. 조그만 조직으로 하다가 포럼으로 창립회의를 한 것은 2년 전이다. 우린 분야와 상관없이 디지털 헬스케어를 하겠다면 문을 열어준다.”
-최근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이 높다.
“때문에 포럼도 점점 커지고 있다. 포럼 소속 회원들과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 많은데, 팀에서도 70억 원짜리 정부 과제를 연구하고 있다. 강원테크노파크와의 연계도 활발하다. 협업이 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의 미래는 어떠리라 전망하나.
“디지털 헬스케어라고 쉽게 말하지만 안에는 많은 분야가 포함돼 있다. 빅데이터·메타버스·인공지능(AI)·블록체인·전자의무기록(EMR)·유전체 등 수많은 요소가 포함돼 있어 디지털 헬스케어를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우린 ICT 기술을 통해 의료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게 목표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각 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할 게 아니라 전문가의 지식을 바탕으로 대처방안과 예방, 예측을 해야 한다. 의료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전 분야가 그렇다.”
-새 정부도 여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규제는 양날의 검과 같다. 현존하는 규제들을 과감히 푸는 조치는 향후 발전을 위한 걸림돌을 사전에 치우는 것이라고 본다.”
-규제라면 비대면 진료 허용이 대표적인데.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면 환자 불편이 상당부분 개선될 것이다. 검사 결과를 받아보려고 지역에서 서울로 내원하는 불편이 없어질 것이다. 과거 가나, 피지,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들이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게 토로를 해 온 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한 대사관 가족이 아파서 인근 국가로 이동하다가 비행기에서 사망한 일도 있었다. 살릴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웠다.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 외교관들과 주재원, 재외동포들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6~7개국 대사관에 원격진료 시스템을 설치해 그들의 상태를 돌본 경험이 있다.”
-비대면 진료가 필요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여전하다.
“반대하는 측은 원격의료 전면 허용 시 대형병원으로 환자 쏠림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보건당국은 이러한 우려 해소를 위해 수가를 올리거나 쏠림현상 방지를 위한 제도 보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원격의료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예 의료의 영리화를 해야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결국 조절과 방향성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신분이 높든 낮든, 돈이 많거나 적어도 똑같은 기준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의료 서비스는 누구에게나 동일해야 한다. 쉽게 말해 돈을 더 내고 더 좋은 치료를 받는다? 이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 나는 영리병원은 반대한다. 영리병원이 과연 국민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나. 의료의 목표는 국민에게 좋은 혜택을 주자는 것이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ICT 기술을 통해 더 나은 의료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자는 것이지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 나는 외과의사
-외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선 나와 잘 맞았다. 외과는 타 진료과보다 가장 가시적으로 환자 치료의 보람이 있다. 암 수술을 하고 나서 환자가 완쾌됐을 때 보람은 드라마틱하다.”
-드라마틱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지금껏 돌본 수많은 환자들은 치유가 됐지만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외과의사는 영광스런 부분이 있지만, 결과가 나쁠 때는 큰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걸 꿋꿋하게 이겨내야 하는데, 외과의사 중에 수술을 그만두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아들에게 외과의사를 하라고 말을 못한다. 빛은 밝지만 그늘도 진하니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외과에 지원하는 젊은 의사 수는 계속 줄고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큰 기쁨이 있지만, 이면에는 환자가 환자를 잃었을 때의 절망감도 깊으리까. 외과의사들이 지금보다 더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미국은 외과의사로 성장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자부심도 크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트레스와 일의 강도는 높은데, 수입은 많지 않으니까 젊은 의사들에게 외과를 선택하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특히 외상외과 분야는 상황이 더 어려운 것 같다.
“외상외과는 더 키워야 한다. 외상을 다루는 의사들은 온종일 환자를 기다리며 출동대기 상태로 있어야 한다. 불과 수분 내에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극한의 스트레스에도 외상의 수가가 상대적으로 낮다보니 그 분야를 담당하는 사람만 계속하고 새로 지원하는 사람은 줄고 있다. 병원에서도 비교적 낮은 대우에 전임교수가 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생각해보라. 살면서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데 골든타임을 지켜줄 외상외과야 말로 우리 삶의 ‘안전핀’이 아닐까? 그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이 더 늘어나야 한다.”
-병원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환자는 치료를 잘하는 의료진이 있고, 친절한 병원을 원한다. 단일 병원으로는 그게 어렵다. 국군수도병원장 재직 당시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장병들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병원보다 더 좋은 병원이 돼야 하는데, 단일 병원의 힘만으로는 그게 어려우니 서울대병원 등 뛰어난 의료진과 인프라가 갖춰진 의료기관간 협업을 시도했다.
격오지에 거주하는 환자는 서울의 상급종합병원에 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병원과 서울의 대형병원 간의 원활한 협진 체계를 통해 지역병원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병원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을 갖지만, 서울대병원 등 국·공립대병원은 좀 더 그러한 역할을 요구받는다.
“서울대병원 등 국·공립대병원이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하버드대학병원이나 존스홉킨스병원과 경쟁해서 병원의 수준을 더 올려야 한다. 소속 교수들이 마음 놓고 연구와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만 마련되면 되지 않을까? 결국 구성원의 수준이 높아질 때 소속 병원의 수준도 높아진다. 병원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돈은 저절로 벌린다. ‘원팀’이 되기만 하면 된다.”
-원팀이라니. 독불장군처럼 밀어붙이는 스타일인가(웃음).
“천만에! 내가 인기가 좀 있다(웃음). ‘원팀’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웃음). 분당서울대병원은 외과 교수만 20명에 펠로우도 20명이다. 아주 똘똘 뭉쳐 있다. 외과는 엄청 단단하다. 외과, 내과, 방사선과, 병리과는 1년에 한 번씩 해외로 워크숍을 다녔다. 지금까지 12번 이상 다녔다. 한 팀을 만드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쉽다. 자부심을 갖게 하면 되니까.”
인터뷰 말미 한 교수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그는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과 본업인 외과의사로서의 ‘야성’을 구분하고 싶어 했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의 차세대 산업은 바이오헬스 분야가 될 것이며, 해당 분야가 우리나라의 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맡으리라 확신했다. 디지털헬스케어연합포럼 회장으로 그는 의료계와 관련 산업계를 잇는 마중물 역할을 꺼내들었다.
“디지털 헬스, 바이오헬스 분야가 성장하는데 우리가 마중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하는 기업을 도와야죠.”
그렇다고 ‘칼잡이’의 본성을 멈출 생각도 없다. 한 교수는 “야성은 살아있다”며 웃었다.
“지금도 미국외과학회 회장 등이 수술 연수를 받으러 오기 때문에 수술은 계속하고 후배들도 더 열심히 가르쳐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