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살면서 겪는 주요 순간들이 수많은 기억의 구슬로 남아 뇌의 거대한 저장고에 보관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듯 기억은 특정한 하나의 순간 내지는 사건의 모습으로 머리 속에 남는다. 하지만 사실, 삶의 모든 순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람이 그중 한 순간을 떼어내 별도의 사건으로 기억하는 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날까?
미국 시더스-사이나이 병원 연구진이 연속된 경험을 특정한 기억으로 분리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뇌 신경세포를 발견했다. 알츠하이머나 치매 등 기억과 관련된 질병 치료에 응용될 수 있으리란 기대다.
이 연구는 7일(현지시간)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게재됐다.
■ 기억을 만드는 '사건의 경계선'
연구진은 진단 목적으로 뇌에 전극을 삽입한 간질 환자 19명의 데이터를 수집, 인간의 뇌가 연속된 경험을 별개의 사건으로 분리해 기억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고, 뇌에 나타나는 활동을 기록했다. 이 영상들은 내용 중 별개의 사건으로 분리되어 기억될만한 '인지적 경계선'을 포함하고 있다. 연구 목적을 위해 이러한 경계선은 '뚜렷한(hard)' 것과 '흐릿한(soft)' 것 두 종류로만 나뉘었다.
흐릿한 경계는 영상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걷는 장면에 이어 세번째 사람이 대화에 참여하는 장면이 나오고, 전체 이야기는 이어지는 상황 등으로 표현했다. 뚜렷한 경계는 복도 장면에 이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나타나는 식으로 표현했다.
분석 결과, 뚜렷한 경계와 흐릿한 경계 모두에서 반응을 보이는 신경세포들이 중앙 측두엽에 있었다. 반면 뚜렷한 경계선에만 반응해 활동이 활발해지는 신경세포도 있었다. 연구진은 전자에 '경계선 세포', 후자에 '이벤트 세포'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영상 시청과 같은 외부 자극으로 경계선 세포나 이벤트 세포가 활성화되고, 이렇게 활발해진 활동은 뇌를 새로운 기억을 형성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고 연구진은 추정했다. 특히 뚜렷한 경계선을 접할 때 경계선 세포와 이벤트 세포가 모두 활성화되기 때문에 뇌 활동이 최고조에 이른다.
뇌의 경계선 반응은 마치 컴퓨터에 새 폴더를 만들어 파일을 넣는 것과 같다. 다음 경계선을 접하면 앞선 폴더를 닫고 다른 폴더를 만드는 것이다.
우엘리 루티샤우저 시더스-사이나이 병원 교수는 "뇌의 경계선 반응은 마치 컴퓨터에 새 폴더를 만들어 파일을 넣는 것과 같다"라며 "다음 경계선을 접하면 앞선 폴더를 닫고 다른 폴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억을 되살릴 때에도 뇌는 경계선 반응을 활용한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뇌 세포가 활성화되면 기억 시스템은 이 활동 패턴을 과거 경계선 근처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던 활동들과 비교한다. 비슷한 것을 찾으면 폴더를 열고 잠시 그때로 돌아가 세부 기억을 확인한다. 경계선 반응이 정신적 시간여행을 위한 안내 표시 역할을 하는 셈이다.
■ 기억 되살릴 치료법 힌트 제시
이를 실증하기 위해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기억 테스트를 실시했다.
우선 사진 이미지를 여러 장 보여주고, 사진들이 영상에 등장한 장면인지 물었다. 참가자들은 뚜렷한 경계선이나 흐릿한 경계선 후에 나온 장면을 담은 이미지를 더 잘 기억했다. 경계선을 접한 후 새 폴더가 생긴다는 가설과 일치하는 결과다.
이어 영상에 나온 이미지를 여러 장 보여주며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나왔는지 물었다. 참가자들은 뚜렷한 경계선과 먼 쪽에서 나왔던 이미지의 등장 순서를 기억하기 힘들어했다. 뇌가 이들 이미지를 다른 기억 폴더 속에 저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이벤트 분할을 돕는 치료 요법이 기억 장애를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지 분위기를 바꾸는 것 같은 단순한 행동도 경계선을 강화할 수 있다. 루티샤우저 교수는 "상황의 맥락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라며 "익숙한 거실 의자보다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장소에서 공부하면 기억력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향후 경계선 세포와 이벤트 세포가 도파민 뉴런을 활성화하는지, 도파민이 기억 강화에 활용될 수 있을지 검증할 계획이다.
이벤트 세포가 뇌파의 일종인 세타파와 함께 활성화될 때, 사진 순서 기억 테스트 참가자들이 더 좋은 결과를 얻은 점도 눈길을 끈다. 세타파는 학습과 기억 등에 관련된 뇌파다. 뇌를 자극해 세타파를 조정, 기억 장애를 개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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