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와 경제민주화론자의 불편한 동행

[이균성의 溫技] 불편한 동행의 조건

데스크 칼럼입력 :2021/12/06 13:08    수정: 2021/12/06 16:54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2일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이 주최한 대선 후보 초청 ‘스타트업 정책 토크’에서 “규제는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라고 말했다. 그 취지는 짐작이 간다. 사회 변화에 따라 낡아졌거나 불필요한 규제는 개선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 지나쳤다고 본다. 사회와 법제도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쳐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규제 자체를 악(惡)으로 보는 인식이 상당하다. 특히 산업계에서 이런 인식이 강하다. 규제가 기업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인식과 우려에는 상당한 근거와 논리가 있다. 기업의 자유가 제한되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어들며 결과적으로 경제가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경제가 후퇴하면 기업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초청 스타트업 정책 토크

현실은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현실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자유는 다른 쪽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누군가의 자유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낳는다면 그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법철학이다. 그것이 곧 법과 제도이고 규제이다.

규제는 암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必要惡)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악(惡)인데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규제를 다루는 일은 극약을 처방하는 것만큼 고도의 전문성과 세심함이 요구된다. 쓸 곳과 안 쓸 곳을 섬세하게 따져야 하고, 써야 한다고 판단되면, 이해 관계자와 반드시 합의를 거쳐야 한다. 입법기관인 정부나 국회가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 일을 부정해선 안 된다.

“규제는 암적 존재”라는 말은 반정부적이다. 정부가 기업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아나키스트적이다. 그런 이가 정부 수장이 되겠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또한 평생을 규제의 다른 이름인 법(法)의 집행자로 살지 않았던가. 윤 후보에게서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규제를 지나치게 일반화하기 때문이다. 규제를 일반화해서 논하면 그것이야 말로 탁상공론이 될 뿐이다.

윤 후보와 달리 ‘킹메이커’로 불리기를 거부하지 않는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은 소위 경제민주화 신봉자다. 그가 말하는 경제민주화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었고 본 적이 없으니 알 길도 없다. 다만 경제에서 시장 원리를 채택한 나라에서 굳이 민주화란 말을 붙인 걸 보면 시장 외에 뭔가 다른 곳의 역할이 강조될 것이다.

경제에 있어 시장 원리를 보완할 곳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 모든 시장 참여자, 그러니까 결국에는 국민의 대리기관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그 국민의 대리기관은 정부나 국회이지 않겠는가. 그곳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제도, 그러니까 법과 규제를 만들고 집행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윤 후보 입장에서는 김종인식 사고가 암적 존재라는 형식논리학적 귀결에 이르게 된다.

그들의 만남은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극적이다. 극(劇)이 왜 필요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 삶에서 놓치기 쉬운 걸 깨닫게 함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비극을 보고 역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둘의 만남은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유로 극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관객들이 어떤 기대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부터 정치의 욕망은 결국 사회의 창조다. 그들은 스스로를 창조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 편의 연극을 만드는 것처럼. 문제는 인간들의 삶은 연극을 보는 관객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거다. 그들이 어떤 연극을 하고 어떤 창조를 생각하느냐에 따라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다. 연극의 눈물이 정치에서는 피눈물이 되고 더 나아가면 죽고 사는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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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에게 극(劇)은 극장이나 TV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현실의 삶은 그걸 볼 시간마저 부족할 만큼 팍팍하다. 그 팍팍함에 대한 공감이 먼저다. 정치는 삶의 팍팍함을 알아주는 일이어야 한다. 이벤트가 아니다. 가난하고 힘든 자의 자리에 같이 서서 그 입장을 온전히 공감해주는 일이다. 공감되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만 되풀이 하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에서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삶은 어쩌면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서 같이 가는 불편한 동행이다. 삶이 괴로워지는 것은 그 불편한 동행이 때론 의무처럼 강요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비극이 자라난다. 윤석열과 김종인의 동행이 주목되는 까닭이 거기 있다. 불편한 동행을 감내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경우뿐이다.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이득(권력)이다. 윤석열과 김종인의 동행은 무엇에 기반한 것이고 얼마나 지속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