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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성의 溫技] 몸과 정신의 분리

데스크 칼럼입력 :2021/08/20 10:44

삶은 꼬집으면 아픈 현실이다. 삶이 곧 몸이기 때문이다. 몸은 삶의 기록이고 찬찬히 살펴보면 상처투성이다. 순두부처럼 태어나서 썩은 고목처럼 변해가는 게 인간의 몸이고 그 몸을 그렇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곧 삶이다. 삶의 고통은 말하자면 존재론적 필연이다. 이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인생이란 없다. 그러므로 내 몸과 타인의 몸을 잘 보살피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

몸은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학대받아왔다. 몸과 정신은 분리되어 있고, 몸은 부차적이고 정신이 중심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무지(無知) 때문이다. 생물과학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까지 인간의 문명은 대부분 이 무지의 지지자였다. 몸(그러니까 현실)이야 고달프더라도 정신(그러니까 가상)만 잘 갈고 닦으면 ‘수준 높은 인간’이 된다는 ‘환상’에 빠져 고통의 수레바퀴를 밀어온 것이 우리 삶이다.

출처=이미지투데이

그 환상은 몸이 이르지 못할 곳으로 정신을 밀고가려는 망상이다. 이 과정에서 몸은 혹사될 수밖에 없다. 과도한 다이어트나 성형수술이 그렇고 군대나 체육 특기생의 지옥훈련도 마찬가지다. 매출목표를 위한 절제되지 않는 노동도 예외가 아니다. 정의를 위한 것이라는 전쟁은 최악이다. 정신을 몸과 분리하려한다면 정신은 몸에 폭군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몸은 물론이고 타인의 몸에까지도.

문제는 그게 인간의 문명이란 것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더 예뻐지고, 더 강해지고, 더 많이 벌고, 싸워서 이겨야만 행복하다고 믿도록 인류의 문명은 개발되고 진화해온 것이다. 그 믿음이 진짜 행복인지 몸이 갖는 고통의 이면인지는 알 길 없지만 그게 대세인 건 문명하다. 이렇듯 몸과 정신을 분리하려는 인간의 문명은 이제 그 정점으로 치닫는 듯하다. 메타버스.

메타버스는 메타(meta)와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 메타는 초월을 뜻하는 접두어다. 위치나 상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유니버스는 우주나 세계를 뜻한다. 메타버스는 그러므로 ‘현실 세계를 초월한 변화된 또 다른 세계’ 쯤 될 것이다. 현실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현실과는 다른 가상의 그 어떤 세계. 몸이 거기까지 이르긴 어렵지만 정신은 쉬 갈 수 있는 곳. 천국? 아마도. 인류의 오랜 꿈!

인류의 오랜 꿈? 그렇다. 몸이 아니라 정신만 들고나기에 활동 공간이 무제한으로 확대되는 곳! 메타버스는 그러므로 화성을 도시로 개발할 수 없는 한 앞으로 인류 최대 건설사업이 될 것이다. 아메리카 식민지를 개척했던 수백 년 전 유럽인들처럼 지금 세계 유수 IT 기술기업들이 그곳으로 몰려가는 이유도 그것이다. 총칼 없이 피를 보지 않고도 아이디어와 기술만으로 건설할 수 있는 대제국.

그 세상이 낯설지는 않다. ‘싸이월드’라는 서비스를 통해 이미 20여 년 전에 그 일면을 봤다.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가 무엇이고 어떻게 활동하는 지도 잘 안다. 지금 있는 모든 유무선 인터넷 서비스 또한 메타버스의 부분이다. 우리는 이미 현실세계와 깊게 연관돼 있으면서도 현실세계와 뭔가 다른 메타버스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놓고 세계 IT 기업들의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다.

메타버스 개념이 폭발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코로나19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경제 필요성이 급속히 커졌고 그에 맞춰 기술발전 속도도 배가되고 있다. 그동안 비대면 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사이버공간에서 얼마든지 해결 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이에 용기를 가진 IT 기업들이 가속엔진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개념이 체계화한 것이다.

많은 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메타버스의 신세계는 현실세계와 비교해 얼마나 실감나고 또 얼마나 흥미로울 것인가. 어떤 서비스가 몸과 분리된 우리의 정신을 포로로 사로잡을 것인가. 그 과정에서 승자와 패자는 또 어떻게 갈라질 것인가. 그 세계를 이끄는 규칙은 무엇이고 누가 어떻게 정하게 될 것인가. 무엇보다도 메타버스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얼마나 더 분리시켜놓을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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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딱 하나다. 중독(中毒). 모든 중독은 정신을 위해 몸을 학대하는 행위다. 사실은 몸이 곧 정신이고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분리돼 있다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결과는 악순환일 뿐이다. 몸이 곧 정신이고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정신을 위해 몸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늘 정신과 몸의 분리다. 분리되면 싸우고 그것이 고통이다.

몸과 정신의 분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텍스트 중 하나가 장자(莊子) 꿈, 호접몽(胡蝶夢)이다. 꿈속에서 잠자는 장자를 내려다보는 나비가 실재인지 나비 꿈을 꾸는 장자가 실재인지에 대한 오래된 질문. 이 텍스트는 정신과 몸의 분리를 주장하려고 꾸민 것일까, 반대로 그것이 하나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것일까. 그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