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긱 이코노미’에 대한 기대와 우려

"논의 테이블서 IT로 현명한 대안 찾을 수 없을까?"

전문가 칼럼입력 :2021/06/15 09:33    수정: 2021/06/15 09:42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1920년대 미국의 재즈 공연에선 일정한 멤버를 두지 않고 주변의 연주자 중 몇몇과 단기계약을 맺고 팀을 꾸려 공연을 하는 일이 성행했다. 단기공연에 참여하는 연주자를 '긱(Gig)'이라 불렀다. 공연이 끝나면 팀 활동도 끝났다. 새 공연은 연주자 긱들 중 일부와 새로 팀을 구성해 진행했다. 과거 재즈 공연처럼 최근 목적한 일을 위해 초단기 계약으로 인력을 활용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긱 경제(Gig Economy)'라고 한다. (2019년 8월18일 ‘도전에 직면한 긱 경제’, 조선일보)

얼마 전 후배로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규직을 없애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웃자고 한 말이었겠지만 유쾌한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필자는 행사 이벤트 기획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CD-ROM 타이틀, 온라인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다가, 출판사와 광고회사 등을 거쳐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을 오가며 어공(어쩌다 공무원)을 하기도 했는데, 그 사이사이 기간이 정해져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또는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백수로 지냈던 시절이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정규직 노동자는 하루에 8시간씩 주 5일을 회사가 정해준 위치에서, 회사가 요구하는 노동을 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노동의 효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기술의 발달은 노동시간 단축이 아닌 일자리 감소로만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저명한 기업인, 경제학자, 저널리스트, 정치인 등이 매년 모여 세계 경제에 관해 토론하고 연구하는 다보스 포럼에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대부분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며 세계 35억 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우려인지, 경고인지, 협박인지 모를 메시지를 보냈다.

노동의 가치는 시간에 비례할까?

긱 이코노미(제공=모티링크)

지난 2017년 덴마크에 정책 연수를 간 적이 있다. 코펜하겐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한 시간은 대략 6시 즈음이었다. 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통역을 맡은 가이드는 숙소까지의 거리와 소요시간을 알려주며 덴마크는 3시가 러시아워라 차가 막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난 덴마크와 우리나라의 1인당 GDP를 비교해 보았다. 덴마크의 1인당 GDP는 우리나라보다 대략 두 배가량 많았다. 우리나라보다 더 적은 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더 큰 효율을 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노동시간이 적기 때문에 오히려 더 노동의 효율이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난 올해 초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금까지 나온 백수 관련 책들 대부분이 백수 탈출을 위한 ‘자기 계발서’였다면, 내가 쓴 책은 백수의 사회적 쓸모를 인정하자는 ‘백수 인정서’라고 할 수 있다. 난 노동의 가치가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하며, 백수의 정의, 백수를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졸저의 한 부분을 인용해 소개한다.

그런데 코로나 이전엔 아침 일찍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 들어오던 남편이 재택을 하며 일하는 시간이 딱 5분이라는 것이었다. 메일 확인하고, 결재하고...

코로나로 인해 학교도 온라인 개학을 했고,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과장이긴 하겠지만, 우리는 다양한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더 적은 노동을 통해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가 함께 개척해 온 문명의 결과를 적당히 분배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백수처럼 살아갈 날도 곧 도래하지 않을까? 하루에 1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를 누리는 그런 시대 말이다. 갑자기 그런 시대가 들이닥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백수들은 인간이 해야 할 새로운 노동을 개척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여가라는 노동을… (채희태,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중에서)

긱 이코노미에 대한 기대와 우려

아마 국가 정책 중 가장 어려운 것은 교육 정책과 부동산 정책일 것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우려처럼 근대 교육은 능력주의를 내세워 오히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교육정책이 유지되는 이유는 불평등과 차별을 원하는 사람이 교육정책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2013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다음으로 부동산 정책이 어려운 이유는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모두 국민이라는 단어로 묶어 물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은 올라도 문제지만, 떨어지면 더 큰 문제가 된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면 서민들의 원성이 올라가지만,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 지도층의 협조를 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긱 이코노미도 마찬가지다. 정보통신기술(ICT)과 플랫폼의 성장으로 인해 긱 이코노미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지만, 교육과 부동산 정책처럼 긱 이코노미도 수혜자와 피해자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긱 이코노미로 혜택을 받는 노동자도 있겠지만, 어쩌면 새로운 노동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양쪽 이해관계를 숨기지 않고 수면 위에 올려놓고 논의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이해관계를 드러내기보단 숨기는 데 더 익숙하다.

라틴어권 국가에서는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아예 ‘stakeholder’(이해 당사자)라고 까놓고 논의를 시작한다.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고기(stake)'를 '붙잡고 있는 사람(holder)'이라는 의미다.

긱 이코노미를 통해 가장 크게 대립이 예상되는 건 당연히 사용자와 노동자의 입장 차이다. 사용자는 긱 노동자의 노동이 매출로 이어지지 않으면 노동자에게 지급한 대가가 기부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긴다. 반면 노동자는 매출은 회사와 사용자의 사정일 뿐, 자신이 투자한 시간만큼의 보상을 원할 수 있다. 긱 이코노미를 둘러싼 이 상반된 입장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정규직이라는 계약 형태는 사실 노동 그 자체보다는 노동자의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근로 계약서에 노동에 대한 내용이 없진 않지만, 노동 시간과 관련한 내용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사용자의 입장에선 계약서에 명기된 시간 안에는 회사가 노동자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선 그저 시간만 내어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긱 노동자의 경우는 노동의 시간보다는 노동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 정규직 노동자가 한 달 동안 할 일을 긱 노동자가 일주일 만에 한다면 긱 노동자에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긱 이코노미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잠시 필자의 경험을 소개해 보겠다. 난 얼마 전 모 출판사와 긱 형태의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대표는 시리즈 출판을 계획하고 있다며 기획 인세 2%를 줄 테니 출판 기획을 해 달라고 의뢰했다. 몇 번의 회의를 통해 난 대표가 흡족할 만한 시리즈 기획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페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노동의 보상은 어떻게 지급할 거냐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대표는 책이 나와야 페이를 지급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럼 출판사의 사정으로 책이 나오지 않으면 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 출판사 대표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내 주장에 공감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 출판사 대표는 나에게 새로운 계약 내용을 제안했고, 난 그 계약을 받아들였다. 계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기획이 진행되는 동안 기획 인세를 매달 나눠 지급한다.

2. 지급한 기획 인세는 선인세로 책 출간 후 발생하는 인세에서 차감한다.

3. 만약 프로젝트가 취소될 경우 선지급한 인세의 50%를 회수한다.

긱 이코노미와 IT

디지털이 연속 신호인 아날로그를 효율적으로 표현했듯, 하고자 한다면 IT도 계량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식 노동의 시간과 가치를 정량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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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알아내 히에론 2세에게 상을 받았다. 사무실 구석에 샤워기(가격은 생략한다)를 설치해 달라는 앨런 케이(Alan Kay)의 요구를 묵살했던 회사는 그가 집에서 샤워를 하며 떠올린 아이디어의 가치를 어떻게 계량해 보상해야 할까?

시대의 변화는 막을 수 없다. 긱 이코노미가 새로운 노동의 형태로 떠오른다면 익숙하지 않다고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의 기대와 우려를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아무리 IT가 진보해도 울지 않는 아이에게 우유를 줄 인공지능 보모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긱 이코노미를 둘러싼 기대와 우려를 모두 논의의 테이블 위해 올려놓을 수 있다면, 한껏 진보하고 있는 IT가 기대와 우려를 결합해 보다 현명한 대안을 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25년 이상 예술과 실무, 온라인과 오프라인, 민과 관을 넘나들며 콘텐츠 및 정책 기획자로 활동했다.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사회학 석사이며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의 저자이다. 경영의 과학화를 위한 사회학적 연구와 더불어 디지털 워크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커넥티드 리모트워크(Connected Remote Work) 업무 환경의 구현을 위한 기획업무를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