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일과 삶은 반드시 분리해야 할까?

"공과 사 분리 아닌, IT로 유연한 연결 노력해야"

전문가 칼럼입력 :2021/05/18 10:51    수정: 2021/05/18 10:59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우리는 보편적으로 '공(公)'과 '사(私)'가 분리돼야 한다는 상식을 갖고 있다. 이는 공과 사를 분리할 수 없으나 그러한 지향이라도 갖자는 의미일 수도 있고, 공과 사의 유착이 낳은 공정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경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식에서 벗어난 질문을 한번 해 보자. 공과 사를 분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아가 공과 사를 분리하는 것이 가치적으로도 옳을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공과 사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은 '공(公)'을 "여러 사람에 관계되는 국가나 사회의 일", '사(私)'를 "개인이나 개인의 집안에 관한 사사로운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사전적 정의로 모든 사회적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참조는 할 만하다.

일과 생활의 균형(제공=모티링크)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을 던지자면 첫 번째 '공'의 사전적 정의에 있는 '여러'의 범위와, 두 번째, '사'의 사전적 정의에 있는 '개인'에 대한 규정, 그리고 세 번째, 두 개념의 정의 안에 들어 있는 '국가나 사회'와 '개인이나 개인의 집안' 사이의 관계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여러'의 범위는 입장에 따라 '모두'가 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둘 이상이면 충분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입장과 상황이 동시에 한 공간에서 부딪히는 경우다. '여러'를 둘러싼 이런 인식의 차이는 과반수라는 타협을 만들어 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과반이 넘으면 모두로 인정해 주자라는 것이다. 입장과 상황에 따라서는 2/3가 넘어야 모두라고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니러니컬하게도 현대 사회에서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소위 인권의 대상은 과반이 넘는 다수가 아니라 과반으로부터 배제된 다양한 소수를 향한다.

두 번째 의문은 개인(또는 개인의 집안)에 대한 규정이다. '사'가 개인에 관계된 것이라면 둘 이상의 개인(또는 둘 이상의 집안)이면 '공'으로 보아야 할까?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사고 어디부터가 공인지 구분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공과 사를 분리해야 한다는 당위만이 상식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은 사실 틀린 것이 더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문은 공과 사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이다. 공은 사의 집합적 개념이다. 마치 숲과 나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나무 없이 숲이 이루어질 수 없듯, 사가 없는 공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자주성을 가진 인간은 나무와 달라서 아무리 공의 경계를 단단하게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보겠다. "공과 사를 분리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앞에서 살펴 보았듯 공과 사는 서로 연결돼 있으며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공과 사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한다고 해도 분리된 각각엔 또 다른 이면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뻔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무시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상식이 될 뿐이다. 공과 사의 분리를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러한 상식을 통해 누가 이익을 취해 왔는지, 그리고 누가 손해를 감내해 왔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공과 사, 일과 삶은 서로 연결돼 있다

공과 사는 일과 삶으로 치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직장에서 하는 일은 공이고, 개인의 삶은 사라고 인식한다. 만약 어떤 직원이 가정의 우환이나 회사 밖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회사에 손해나 불편을 끼친다면 회사의 대표나 간부는 그 직원에게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라도 둘 이상의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이므로 공이라고 보아야 할까? 공유, 정유미, 마동석 등이 출연한 영화 ‘부산행’은 마치 지금의 코로나처럼 좀비가 대한민국을 점령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판타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판타지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도 일어날 법한 개연성을 가진 설정이 소개된다. 능력 있는 펀드매니저, 공유는 자신(회사?)이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문제가 있는 회사를 소위 작전을 통해 살려내는데, 그 회사에서 발생한 사고가 좀비 발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펀드매니저는 투자하는 회사의 도덕성을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회사가 자신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느냐, 아니면 손해를 입히느냐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사의 영역일까, 공의 영역일까? 대한민국이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노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해 온 과거의 잘못에 기인하다. 그 반성으로 지금은 대부분의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출산과 육아를 사적인 영역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렇듯 공과 사, 그리고 일과 삶은 분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분리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워라밸'은 기본적으로 공과 사, 그리고 일과 삶이 분리돼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밸런스, 즉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균형을 맞춰야 하는 두 개 이상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과거엔 일(공)을 위해서 개인의 삶(사)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일에 헌신하는  직원들을 회사가 책임지지 않듯, 회사가 요구하는 일을 위해 개인의 삶을 포기하는 직원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과 삶의 연결 예시(제공=모티링크)

IT, 일과 삶을 연결하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주어진 보기 안에서 정답을 찾는 객관식 교육을 받아 왔다. 그 결과, 마치 기계처럼 0과 1, 참과 거짓만을 구분하는 데 익숙해졌다. 0과 1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소수점이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현대 사회에서 참과 거짓은 그 자체보다 대중들이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공과 사, 일과 삶도 다르지 않다. 위에 지적한 것처럼 사전적 정의도 애매하거니와, 만약 사전적 정의가 분명하더라도 다양한 개인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공과 사를 0과 1, 참과 거짓처럼 분명하게 나눌 수도 없다.

공과 사,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공과 사, 일과 삶을 적극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떨까? 과거에 삶보다 일, 사보다 공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는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 없는 한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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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하고 있는 IT는 공과 사, 일과 삶의 연결이 가능할뿐 아니라 더 효율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수업’을 쓴 도러시아 브랜디는 창의적인 글은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온다며 잠에서 깨자마자 글쓰는 습관을 들이라고 충고한다. 창의적인 활동인 지식 노동 또한 회사 의자에 앉아 있는다고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장소는 실험실이 아니라 목욕탕이었다. 뉴턴이 책상머리에 앉아 고민만 했다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조성된 비대면 환경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가능하지 않았던 일과 삶의 연결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하나의 디지털 협업 툴을 사용하고 있는 5개의 비대면 근무 기업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지식 노동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또는 지역에 마련돼 있는 비대면 전용 근무 공간에서 회사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이 가능하다. 이런 근무 환경이 지식 노동을 위한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과 삶의 적극적인 연결을 통해 갈수록 한계에 수렴되고 있는 지식 노동의 효율을 다시금 끌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25년 이상 예술과 실무, 온라인과 오프라인, 민과 관을 넘나들며 콘텐츠 및 정책 기획자로 활동했다.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사회학 석사이며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의 저자이다. 경영의 과학화를 위한 사회학적 연구와 더불어 디지털 워크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커넥티드 리모트워크(Connected Remote Work) 업무 환경의 구현을 위한 기획업무를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