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등 주식에 대한 탐욕을 다스리는 방법

[이균성의 溫技] 물과 불처럼 대하자

데스크 칼럼입력 :2021/01/13 14:40    수정: 2021/01/13 14:53

인간의 본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욕망이다. 욕망의 종류는 너무 많아 헤아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그런데 독자 제위께선 인간의 욕망 중 으뜸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다. 그 또한 욕망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필자는 그 으뜸이 ‘미래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살아가면서 느낄 고통의 모든 요소를 선제적으로 제거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인간의 뇌가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미래다. 뇌가 과거나 현재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미래를 위해서다. 개인이든 사회든 생각을 하는 모든 주체의 행위방식이 그렇다. 행위방식은 같지만 나타난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결과가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크게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정도로 대별할 수 있다. 포기1, 창조, 포기2로 분류하면 세 가지이고, 종교, 정치, 사업, 염세로 하면 네 가지다.

지난 6일 국민은행 딜링룸 전경. 코스피가 장중 사상 처음으로 3000선을 돌파했다.(사진=KB국민은행)

인간의 최고 욕망을 결정적으로 포기한 게 종교다. 인간은 무엇보다 스스로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답을 내린 게 종교다. 종교는 그래서 인간 밖에서 절대자를 찾는다. 인간은 최고의 경지에 올라가봐야 절대자와 범인을 잇는 중개자일 뿐이다. 종교는 대부분 그렇다. 그리하여 미래는 절대자에게 맡기고 인간한텐 욕망의 억제를 주문한다. 구도(求道)가 곧 욕망의 살상이다.

욕망을 포기한 종교와 달리 인간은 또 욕망을 끊임없이 재창조하기도 한다. 두 가지 영역에서 그렇다. 정치와 사업이다. 두 영역은 미래에 대한 관점이 종교와 다르다. 정치와 사업은 미래를 ‘앎의 대상’을 넘어 ‘만들어가야 할 그림’이라고 여긴다. 또 그림은 앎을 토대로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앎의 도구가 바로 과학이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정치와 사업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정치는 종교와 달리 오만한 인간의 산물이다. 도덕과 법률로 욕망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고, 그 최선을 찾는 게 정치이며, 인간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류는 장구한 정치사(政治史)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변치 않는 정치 본질이다. 정치사 중대 장면이 대부분 개혁과 혁명 그리고 전쟁인 까닭이 그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많은 인간을 죽일 수도 있는 게 정치다.

정치가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용한다면, 사업은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용한다. 모든 사업가는 과학의 신봉자다. 인간은 과학으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었고, 더 나은 미래도 과학에서 온다고 믿는다. 정치의 언어가 개혁과 혁명이라면 사업의 언어는 개발과 혁신이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사업은 전쟁이라는 언어를 공유하다. 그 점에서 둘은 결국 ‘과학이 쌓은 거대 정글’이다.

욕망을 집단적으로 포기한 게 종교라면, 개별적으로 포기할 때는 그걸 염세(厭世)라 부른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이 존재하고 그 사실 또한 잘 알면서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수위를 조절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최종 행로다. 그 열패감이 너무 커 종교마저 무의미해지고 구도의 길조차 찾기 힘들 때다. 그 때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자연으로의 회귀. 빈 손으로 왔던 것처럼 빈 손으로 가는 거다.

관련기사

욕망은 그리하여 물 같고 불 같은 것이다. 없으면 살 수 없고, 적절하면 유용하되, 지나치면 흉기로 돌변한다. 인생은 그래서 동지이면서 적이기도 한 욕망과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조율해가는 과정이다. 그건 개별 인생뿐만 아니라 종교도 정치도 사업도 다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 예전처럼 명민하지 못하지만 조금은 원숙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건 욕망과의 거리 조절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또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은 ‘돈의 미래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 욕망 또한 물 같고 불 같은 것이다. 그 욕망과의 적절한 거리가 무엇인지 모두 다 고민하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