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광장’을 지탱하는 키워드는 광장과 밀실이다. 작가 최인훈은 이 소설 서문에서 “광장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밀실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광장은 공적인 토론의 영역이다. 반면 밀실은 사생활이 이뤄지는 곳이다. 광장과 밀실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선 ‘언론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가 보장돼야 한다. 민주국가들이 두 가지를 중요한 가치로 간주하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처한 환경에 따라 한 쪽에 좀 더 무게가 옮겨지기도 한다. 미국과 유럽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를 훨씬 더 강조한다. 수정헌법 제1조에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는 문구를 새겨넣을 정도다.
반면 유럽은 ‘사생활 보호’를 더 중시한다. 그래서 혐오발언이나 허위정보에 대해 더 민감하다. 나치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의 지배를 받았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 "개별 기업의 언론자유 침해 충격적" vs 미국 "허위정보 방치가 더 위험"
미국과 유럽이 광장과 밀실을 놓고 흥미로운 공방을 벌이고 있다. 트위터가 트럼프 대통령 계정을 영구 정지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번 주 들어 아마존웹서비스(AWS)가 극우 소셜 플랫폼인 팔러 호스팅을 중단하면서 논쟁이 더 격화됐다.
그런데 그 논조가 조금 흥미롭다. 허위정보 차단에 훨씬 더 민감한 유럽 쪽에서 '언론 자유 침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포문을 연 것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였다. 메르켈 총리는 “언론의 자유 같은 권리는 입법기관이 규정한 틀 안에서 법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면서 트위터의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개별 기업 결정에 따라 개인의 언론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고 꼬집었다.
프랑스도 가세했다. 레망 본 프랑스 EU 담당 장관은 이날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개별 기업이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는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논평했다. 그는 또 “그런 결정은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라 시민들이 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피해 당사자인 트럼프 대통령 역시 “언론 자유가 공격받고 있다”고 반격했다. AWS에서 퇴출당한 팔러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잠재적인 경쟁자에게 불이익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역시 언론 자유 침해를 우선적으로 내세운다.
반면 미국 언론들의 평가는 조금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 계정 차단 조치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평가하는 매체는 많지 않다. 오히려 트럼프의 폭력 선동과 위험성에 대해 경계하는 논조가 훨씬 더 많다.
미국 IT 매체 씨넷은 “트위터의 트럼프 계정 차단은 수정헌법 1조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플로리다대학 로스쿨 클레이 캘버트 교수의 설명을 곁들였다.
캘버트 교수는 “사람들은 수정헌법 1조를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글을 올릴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사기업들 역시 신문 발행인과 마찬가지로 어떤 의견을 게재할 지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캘버트 교수는 설명했다.
씨넷 뿐 아니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미국 언론들도 대체로 비슷한 논조다. 트럼프가 ‘선거 부정’이란 허위정보를 유포할 뿐 아니라, 폭력을 선동하는 주장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에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거대 IT 플랫폼의 위협에 직면한 유럽의 고민 그대로 드러나
이런 모습은 상당히 흥미롭다. 허위정보나 혐오발언에 대해 훨씬 더 강경한 유럽이 트위터의 조치에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각종 발언들은 유럽에선 오히려 더 강력한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런데 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을 대표하는 나라의 고위 정치인들은 트럼프의 ‘선동’보다 거대 플랫폼의 ‘언론 자유 침해’를 더 강조하는 걸까?
이 대목에서 유럽의 또 다른 고민을 찾을 수 있다. 유럽은 페이스북, 구글 같은 거대 IT 플랫폼의 과도한 영향력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그들이 유럽의 여론 뿐 아니라 언론 산업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거대 IT 플랫폼 규제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가 지난 해 12월 제안한 디지털 서비스법과 디지털시장법이 대표적이다.
디지털서비스법은 온라인 중개 사업자들이 불법적인 콘텐츠에 대해 좀 더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의 허위/선동 주장 같은 것들을 방치할 경우 곧바로 제재를 받도록 돼 있다.
보기에 따라선 디지털서비스법이 요구하는 조치를 트위터가 직접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메르켈 총리나 레망 본 장관은 “충격적인 조치"라는 격한 반응을 보였을까?
표면적으론 개별 기업이 언론 자유 침해 우려가 있는 결정을 직접 한 부분을 문제 삼았다. 메르켈 총리는 “언론의 자유 같은 권리는 입법기관이 규정한 틀 안에서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속내엔 ‘법으로 제어가 되지 않는 거대 IT 플랫폼’에 대한 경계심리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트위터의 차단 행위를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조치라고 판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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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방은 이달말 출범할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의회는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한 통신품위법 230조 개정을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 편향’을 문제 삼는 공화당과 달리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플랫폼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통신품위법 230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트럼프는 임기 막판 몽니를 통해 많은 쟁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