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마지막 글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우리가 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번째 글에서는 좋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그리고 세 번째 글에서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동기화가 가능해진 커뮤니케이션이 역설적으로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의 창궐로 이어졌음을 얘기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마지막 글은 커뮤니케이션의 ‘자격’과 ‘내용’이다.
2015년 우민호 감독은 윤태호 원작의 웹툰 ‘내부자들’을 영화로 만들어 정·경·언 유착의 실체를 폭로했다. 내부자들은 관객수가 1천만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중에서는 2위 ‘친구’보다 무려 100만이 더 많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는 조폭 안상구(이병헌 분)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강력한 대통령 후보인 장필우(이경영 분), 미래자동차 회장 오현수(김홍파 분), 그리고 조국일보 논술 주간으로 있는 이강희(백윤식 분)의 비리를 폭로하지만, 이강희는 우장훈 검사에게 깡패의 말을 누가 믿겠냐며 조롱한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는 어떠어떠하다고 보기가 힘든데, 누구는 어떠어떠하다고 매우 보여진다는 겁니다. 말은 권력이고 힘이야. 어떤 미친놈이 깡패가 한 말을 믿겠나?” (영화 ‘내부자들’ 중 이강희의 대사)
문화콘텐츠는 현실을 반영한다. 때로는 가능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며 대리만족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영화 ‘내부자들’이 흥행한 이유는 촌철살인과도 같은 현실 반영에 있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중요한 것이 내용보다는 자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변화는 ‘인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물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격증의 시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에서 내용보다 자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차고 넘치게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물에 빠졌다는 것에 대한 인지가 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지가 아니라,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기 위한 인지라는 것이다.
누구도 자격이 더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차라리 요행을 바라며 불평등의 고통을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에 집중하는 대신, 차라리 자격증 앞에서 경쟁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껍데기인 자격만 남게 됐다.
불행하게도 자격증을 따기 위해 경쟁을 하면 할수록 자격증을 가진 개인의 처지는 더욱 초라해질 것이다. 자격증은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자격을 결정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학벌이라는 자격증이다. 입시 경쟁이 심해질수록 그 자격을 결정하는 대학의 위상은 올라가고, 학생들은 삶은 비참해진다.
과거보다 대학 정원은 몇 배나 더 늘었지만, 입시경쟁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대학에 서열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 있던 과거의 삼류 대학은 인서울이라는 날개를 달고 구름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그 원인은 인서울 대학의 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10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친구를 돕다가 정치의 맛을 봤다. 어쩌다 공무원으로 구청에서 정책보좌관을 하기도 했고, 우연한 기회에 구청에서 제안한 교육 정책 하나가 주목을 받는 바람에 시교육청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다양한 분야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자격과 내용에 대한 처절한 경험을 했다. 먼저 정치다. 정치를 하는데 따로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힘이 있는 정치인과의 인맥은 정치를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격이 된다. 다양성은 후퇴하고, 거대 정당의 양당구도로 회귀한 지난 총선 경선에서 여당의 예비후보들은 선의의 정책 경쟁이 아니라, 서로 자신의 경력에 대통령의 이름을 넣기 위해 갈등하고, 경쟁했다.
다음으로는 교육이다. 교육에서의 자격은 당연하게도 학벌, 그리고 자격과 점점 무관해지고 있는 나이다. 필자는 얼마 전 여러 저자들과 함께 교육과 관련한 책에 저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저자의 한 사람으로 그냥 원고만 던져주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과거 출판사에 있었다는 이유로 저자들을 대표해 책의 기획과 편집까지 맡게 됐다. 11명의 저자들이 쓴 원고를 검토하며, 책의 꼴을 갖추기 위해서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서문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멋지게(?) 서문을 썼다. 하지만 자격이 안 된다는 이유로 결국 내가 직접 쓴 서문 밑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미루어 짐작컨대 여기서 말하는 자격이란 아마 학벌과 나이였을 것이다. 차라리 서문의 내용에 대해 문제 제기를 받았다면…
마지막으로 행정이다. 문고리 권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행정에서의 자격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결정한다. 심리적으로 행정의 인사권자와 학연, 지연, 혈연관계라면, 그리고 아무리 급수가 낮고 나이가 어리더라도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단체장을 보좌하고 있다면 내용과 무관하게 자격을 갖게 된다.
IT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통해 만물의 영장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꿱꿱대며 소통을 하던 유인원 가운데에서 분절적 언어를 사용하는 진화된 인류가 등장하게 됐고, 뒷담화를 통해 더욱 정교해진 언어를 통해 인류는 마침내 문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우리의 언어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언어가 뒷담화를 통해 진화했다면, 커뮤니케이션은 IT의 등에 올라타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을 위계가 방해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자격이 압도하고, 커뮤니케이션을 동기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을 가로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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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물이 담기듯 자격은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그릇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릇 안에 적어도 적절한 내용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브락사스가 알을 깨고 나오듯, 커뮤니케이션의 필요가 만든 IT의 발전은 이제 커뮤니케이션이 갖고 있었던 전통적인 한계를 깨기 위해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IT를 통해 확장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역할과 쓸모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확장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키(Key)는 확실히 IT가 쥐고 있는 듯하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