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NC 집행검, 현대 야구 새로운 흐름 완성하다

데이터 분석과 가치투자의 행복한 결합

데스크 칼럼입력 :2020/11/25 10:43    수정: 2020/11/25 13:25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공포의 외인구단’이란 만화가 있다. 만화가 이현세 씨가 한국 프로야구 출범 첫해인 1982년에 내놓은 작품이다. 

대표적인 야구 명작 만화인 이 작품엔 ‘필살수비’란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절대 실점해선 안 되는 상황일 때 쓰는 비법이다. 우타자가 나오면 1루수가, 좌타자는 3루수가 전진 수비하는 독특한 수비 방식이다.

이 때 투수는 바깥쪽 꽉찬 빠른 볼을 던진다. 타자가 치게 되면 전진 수비한 수비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2020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NC 다이노스 팀이 집행검을 높이 들고 있다. (사진=NC다이노스)

작가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 장면 속엔 초보적인 ‘수비 시프트’ 개념이 담겨 있다. 타자의 타구가 갈 확률이 가장 높은 곳에 수비수를 배치하는 것. 그게 바로 수비 시프트다.

물론 수비 시프트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그린 것처럼 단순하진 않다. 정교한 데이터 분석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조금만 엇나가도 어이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반면 성공할 땐 상대팀 간판 타자의 기를 꺾어 놓는 효과가 엄청나다. 

두산 베어스를 꺾고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NC 다이노스는 시리즈 내내 이런 고급 야구를 잘 보여줬다.

뛰어난 전력에 날개 달아준 탁월한 데이터 분석 

24일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 7회초 두산 공격을 떠올려보자. 4대 0으로 리드하고 있던 NC는 무사 주자 2, 3루 위기에 몰렸다. 타석에 들어선 것은 두산 간판 타자 김재환. 한국시리즈 내내 침묵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서운 타자였다. 큰 것 한 방이면 시리즈 흐름이 바뀔 수도 있었다. 

이 때 NC 내야 수비진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3루수 박선민은 2루 쪽으로 옮겼다. 2루수는 우익수 앞에서 수비했다. 김재환이 친 타구는 신기하게도 자리를 옮긴 2루수 쪽으로 갔다.

한국 시리즈 내내 두산 간판 좌타자인 김재환과 오재일을 봉쇄했던 바로 그 작전이었다. 뛰어난 데이터 활용 능력을 자랑했던 NC 다이노스의 장점이 잘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오재일과 김재환은 한국시리즈 타율 0.190과 0.043으로 침묵했다. 중심 타선이 봉쇄된 두산은 특유의 강점을 살리지 못하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현대 야구는 투지를 앞세우는 검투가 아니다. 과학이다.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같은 분석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미국 야구를 제패한 NC 다이노스와 LA 다저스는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팀이다. 

현대 야구 팀 중 첨단 데이터 분석 기술인 ‘세이버메트릭스’를 활용하지 않는 곳은 없다. 투구추적시스템이나 타구 발사속도 같은 것들은 기본적으로 살핀다. 타구 방향과 투수 구질을 감안한 수비 시프트 역시 이젠 상식으로 통한다.

(사진=NC다이노스)

하지만 이런 기술을 팀 전반에 녹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야구의 성지’를 침범하려는 외부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택진 구단주와 황순현 대표가 뒤에서 밀고, 이동욱 감독이 전면에서 이끄는 NC 다이노스는 특별한 팀이다.

난 예전 칼럼에서 LA 다저스가 ‘지속 가능한 강팀’이 된 배경 중 하나는 효율적인 인재 활용이라고 평가했다. (☞ LA다저스 우승 이끈 앤드류 프리드먼의 혁신 참고)

그들은 '이름값’ 대신 ‘필요한 인재’를 영입했다. 이런 의사 결정 역시 그냥 감에 의존하지 않았다.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팀에 꼭 필요한 선수들을 싼 가격에 영입했다. 팀을 만드는 과정에서 효율과 가치투자란 두 가지 덕목을 잘 조화시켰다.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저스틴 터너, 크리스 테일러, 맥스 먼시 같은 선수였다.

그런 점에선 NC도 마찬가지다. 현대 야구를 지배 하는‘가치 투자’란 또 다른 키워드를 잘 보여줬다.

우승 순간 마운드를 지켰던 원종현을 비롯해 김진성, 임창민 등 불펜 3대장은 하나 같이 다른 팀에서 버려졌던 선수였다. NC에 온 이들은 ‘아쉬웠던 2%’ 약점을 보완하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불펜 투수로 거듭났다.

이들은 나성범, 박민우, 강진성, 노진혁, 김성욱 등 기존 선수들과 어우러지면서 팀의 전력을 극대화하는 기반이 됐다. 

데이터 분석 능력은 실제 경기에도 잘 접목됐다.

이동욱 감독은 2차전에서 던졌던 구창모를 5차전 선발로 투입했다. 물론 5차전 선발이 유력했던 드류 루친스키가 4차전 구원 투입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 분석을 통해 구창모의 구위가 정상 회복됐다는 확신을 가졌던 점도 중요하게 고려됐다. 

가치투자의 정점 보여준 '집행검' 양의지 

가치 투자를 통해 강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우승팀이 되기 위해선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LA 다저스는 리그 최고 외야수이자 리드오프인 무키 베츠를 영입하면서 ‘결정적 한 방’을 완성했다. 다저스에 무키 베츠가 있었다면 NC 다이노스엔 양의지가 있었다. (반면 메이저리그 대표 혁신 구단 탬파베이 레이스는 '결정적 한 방’ 때문에 늘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시계를 12시간 전으로 되돌려보자.

우승이 확정된 순간 선수단 앞에는 '진명황의 집행검(집행검)’이 놓였다. 엔씨소프트의 간판 게임 리니지에서 절대 보검으로 통하는 무기였다. 잠시 후 ‘캡틴’ 양의지가 그 검을 뽑아들고 높이 들었다. 야구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었던 우승 세레모니였다.

NC 다이노스의 챔피언 등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다. 이와 함께 양의지가 ‘택진형(구단주 김택진)의 집행검’이란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택진형의 집행검' 양의지는 FA로 팀에 합류한 지 2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선사했다. FA(자유계약) 모범 사례란 세간의 평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줬다. 

FA는 강팀이 우승팀으로 변신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기회비용도 크다. 거액을 투자한 선수가 제 역할을 못할 경우 팀 운영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게다가 FA는 ‘과거의 실적’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반면 투자의 기본은 ‘미래 가치’다.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FA 계약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는 건 ‘거액을 받은 이후’ 나태해진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의 실적이 미래 가치로 그대로 연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양의지와 원종현. (사진=NC다이노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실적과 미래 가치를 잘 감안해야 한다. 또 우승을 노릴 순간이 됐다고 판단했을 때 ‘결정적 한방’을 날려야 한다. (한화 구단이 10년째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는 덴 타이밍을 잘못 맞춘 FA 투자도 큰 역할을 했다.)

LA 다저스의 무키 베츠 투자는 이런 상황에 잘 들어맞았다. 무키 베츠는 ‘오른손 거포’와 ‘안정된 1번 타자’란 두 가지 빈 자리를 메워주면서 다저스의 ‘집행검’이 됐다.

그런 점에선 양의지도 마찬가지다. 팀의 젊은 투수들을 한 단계 성장시키면서 타선에서도 중심을 잡아줬다. 

물론 양의지라면 국내 어느 팀에 가더라도 우승권에 근접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NC의 양의지 영입에선 '결과' 못지 않게 과정이 흥미롭다. 

NC 모기업인 엔씨소프트는 "양의지 영입 경쟁에 나서기 전 분석 프로그램을 활용해 투수 리드 패턴을 분석했지만 아무런 패턴을 찾지 못했다”고 밝혀 왔다. 이름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묻지마 투자'를 한 게 아니란 의미다. 상대팀도 양의지의 리드 패턴을 알아내기 힘들단 점은 투수들의 능력치를 극대화하는 데 더 할 나위 없는 장점이다. 

게다가 이런 장점은 ‘나이 곡선(aging curve)'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과감한 투자가 성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의미다. NC의 양의지 투자가 더 높이 평가되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양의지는 팀에 합류한 이후 이런 가치를 유감 없이 보여줬다. 우승을 결정지은 6차전 8회 송명기를 구원투수로 투입하도록 권유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지친 두산 타자들이 빠른 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점을 간파해 코칭 스태프에 적극 권유한 것이다. 데이터 분석만으론 쉽게 결단하기 힘든 이런 장면은 NC의 거액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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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의 우승이 데이터 분석과 미래를 내다본 가치 투자의 결합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현대 야구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 NC 다이노스의 우승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그리고 내년엔 한 단계 더 향상된 고급 야구를 펼쳐주기를 기대해 본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