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키운 법, 20년만에 '문제아'로 전락하다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미국 통신품위법 230조 공방 톺아보기

데스크 칼럼입력 :2020/11/03 14:54    수정: 2020/11/03 16:05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1996년 제정된 미국 통신품위법(CDA)은 뜨거운 논란을 몰고 왔던 법이다. 이 법은 그 무렵 막 확대되기 시작한 인터넷 음란물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무차별적인 인터넷 음란물 공세로부터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목적의식이 작용한 법이다.

처벌 규정도 무시무시했다. 외설, 폭력 정보를 송신할 경우 2년 이하 징역과 25만 달러 이하 벌금이 부과됐다.

그러다보니 입안 단계부터 엄청난 논란이 제기됐다. 전자프론티어재단(EEF)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라면서 곧바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사진=EEF)

결국 1997년 연방대법원에서 통신품위법 일부 조항이 위헌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통신품위법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제한을 적용해 온라인 상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판단했다. 연방대법원 판사 9명의 만장일치 판결이었다.

‘리노 대 ACLU’로 불린 이 판결은 이후 인터넷이 공론의 장으로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대법원 판결 덕분에 인터넷은 다양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소통될 수 있었다.

프로디지 소송 계기로 플랫폼 사업자 보호 위해 제정 

그런데 정작 인터넷의 발전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오히려 ‘검열’ 의혹을 받던 통신품위법 내부에 있었다. 제정 당시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230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30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양방향 컴퓨터 서비스 제공자나 이용자는 다른 콘텐츠 정보 제공자가 제공하는 어떠한 정보의 발행인이나 화자로 취급 되어서는 아니된다.”

이 규정에 따라 포털이나 플랫폼 사업자는 해당 사이트에 올라온 허위, 비방 콘텐츠에 대한 법적인 책임이 면제됐다. 이들은 콘텐츠 발행자가 아니라 ‘단순 중개자’로 규정된 때문이다.

‘통신품위법 230조’는 인터넷 사업자들이 성장하는 데 든든한 방패가 됐다. 소송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없이 이용자 제작 콘텐츠(UCC)를 마음껏 유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터넷 콘텐츠 비즈니스가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데는 230조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통신품위법 230조 제정을 주도했던 론 와이든 의원.

230조를 만든 건 민주당 상원의원인 론 와이든이다. 그는 당시 공화당 소속이던 크리스 콕스 상원의원과 함께 230조 제정을 주도했다.

당시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인 프로디지가 소송당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한 투자 회사가 프로디지에 자신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한 글이 올라오자, 프로디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프로디지는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이용자 콘텐츠를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행자(publisher)’로 봐야 한다고 판결한 것. 이 판결을 본 콕스와 와이든은 플랫폼 사업자의 법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은 ‘230조’다. 선한 의도를 갖고 콘텐츠 중재 작업을 하는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선 ‘발행자’에 준하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덕분에 야후를 비롯한 초기 인터넷 사업자들은 소송 걱정 없이 사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

대선후보들 "230조 폐지" 의견일치…"보수의견 탄압" vs "허위정보 방치" 

한 때 인터넷 성장의 주역으로 평가받았던 ‘통신품위법 230조’가 요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른바 ‘가짜뉴스(fake news)’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 정가에선 ‘통신품위법 230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230조 폐지 지시를 내린 상태다. 현재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트럼프 대통령 지시를 받아 규정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치열한 대권 경쟁을 펼치고 있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도 같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바이든은 올초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통신품위법 230조를 즉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사건건 대립하는 두 후보가 특정 사안에 대해 의견을 같이하는 극히 드문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두 후보의 결론이 같다고 해서 이유까지 같은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짚어보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조 바이든(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를 비롯한 공화당 핵심 의원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플랫폼의 편향성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젊은 경영자들이 좌편향돼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소셜 플랫폼에서 보수적인 의견들이 차별대우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수시로 트위터 등에서 글이 삭제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이런 제재를 마음대로 가하는 건 ‘통신품위법 230조’ 때문이란 게 트럼프의 생각이다.

반면 민주당은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 회피’를 문제 삼고 있다. 허위조작 정보들이 무차별 유포되고 있는데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플랫폼 사업자가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을 함께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230조’ 뒤에 숨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게 민주당 쪽 주장이다.

관련기사

어느 쪽이 당선되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게 되면 ‘통신품위법 230조’는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형태로든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을 좀 더 강하게 묻는 쪽이 될 가능성이 많다.

다만 결론이 같다고해서 가는 길까지 같을 것 같진 않다. 목적이 어디냐에 따라 같은 조치라도 다른 모양을 띨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닥칠 IT 쪽의 여러 공방 중 유독 ‘230조’에 관심이 가는 건 그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