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 등 주요 국이 디지털자산을 제도권 금융 산업으로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더 늦지 않게 관련 법제도를 정비해 기업들이 마음놓고 사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2일 여의도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가상자산 업권법 제정을 위한 국회세미나'에 참석한 업계, 학계 전문가들은 디지털자산을 활용한 금융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한국가상자산금융협회 주최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가상자산(암호화폐)을 포함한 디지털자산 산업 전반을 다루는 독립법 제정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가상자산을 이용한 자금세탁방지를 골자로 하는 개정 '특정금융 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이 통과되면서 가상자산 산업이 제도화되는 첫 단추를 꼈지만, 특금법은 의무이행법으로 가상자산 거래와 관련된 규칙을 담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가상자산 업권법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디지털자산' 중심으로 요동치는 금융산업
이날 고려대학교 컴퓨터학과 인호 교수(고려대블록체인연구소장)는 돈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되고 있는 큰 흐름을 보고 관련 정책을 펼칠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인 교수는 "지금 법화 같은 '아날로그 머니'가 비트코인이나 리브라, 디지털위안화 같은 '디지털 머니'로 전환하는 시기에 있다"며 "디지털머니 위에서 은행, 보험, 증시에 해당하는 금융 서비스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스위스의 경우 암호화폐 은행을 이미 합법화했다. 5개 회사가 스위스에서 라이선스를 받고 암호화폐 거래, 환전, 수탁은 물론 부동산, 증권 등을 담보로 한 토큰 발행까지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은행 감독기구인 통화감독청(OCC)이 모든 은행이 별도의 라이선스 신청 없이도 고객에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를 할 수 있게 했다. 단순히 수탁뿐 아니라 보관한 고객 암호화폐를 가지고 운용도 할 수 있게 해, 서비스 확장 가능성을 열어줬다.
인 교수는 이 같은 사례를 언급하며 "세계가 이미 디지털자산 기반 금융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잘 발달된 규제와 법제정이 필요하다"며 "휴대폰만 있으면 한국의 금융 서비스를 전세계인이 받을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블록체인 분야 전문 투자사 해시드의 김서준 대표는 글로벌 블록체인 업계에선 탈중앙화 금융(DeFi·디파이) 이라 불리는 '은행 없는 은행' 실험이 진지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디파이는 여러 형태로 진화하고 있지만 토큰을 이용한 예금·대출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토큰을 예치한 사람에게 이자를 주고 대출한 사람에게는 이자를 받는 다는 점은 기존 은행과 비슷하지만, 중개자인 은행 없이 자동화된 계약 이행 시스템(스마트컨트랙트)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이 큰 차이다.
김 대표는 "비트코인을 시작으로 탄생한 프로토콜 기반 경제에는 운영자와 이용자의 경계가 없다"며 "이런 특징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게 디파이 서비스들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디파이에 대해 "자산을 금융기관이나 제3자 개입 없이 직접 보관·교환할 수 있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상이 가능한 새로운 금융 상품"이라고 소개했다.
이더리움 기반 예금·대출 서비스 컴파운드는 자체 토큰 컴프를 발행해 예금 대출자에게 매일 나눠주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예컨대 카카오뱅크에 예금한 이용자에게 카카오뱅크 주식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 디파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는 디파이가 앞으로 다양한 디지털자산으로 확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현재 디파이 서비스는 이더리움 기반 토큰이나 스테이블 코인 위주로 발전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현실세계 붙어 있는 자산까지 확장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대체불가능한토큰(NFT)으로 발행된 게임 아이템을 빌려주고 이것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서비스도 예상해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법제도 없어 눈치만 보는 韓...'나중에' 외치다 실기 우려
전통 금융권에서도 디지털자산 기반 금융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금융업이 엄격한 규제 산업이다 보니, 당국의 명확한 지침이나 법제도가 없어 쉽게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KB국민은행 조진석 센터장도 "특금법 통과 이후 은행들도 가상자산 커스터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커스터디를 넘어 투자 플랫폼까지 가능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전통 은행에 암호화폐 커스터디가 허용되고 전문 암호화폐 커스터디 업체들은 프라임 브로커리지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며 "우리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데 미국은 날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KB국민은행은 내부적으로 디지털 자산 플랫폼 개념검증(PoC)을 진행해 보기도 했다. 예컨대 정기 예금을 디지털자산화 하면, 만기를 채우기 어려운 상황일 때 중도해지하지 않고 양도해, 만기이자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등의 서비스를 구상했다. 내부 반응은 좋았지만, 결국 기존 제도권에서 허용되기 어려운 사업으로 판단해 서비스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조 센터장은 설명했다.
신한은행 장현기 AI컴피턴시센터 본부장도 은행들이 디지털자산 개인키 관리나 커스터디, 디파이에 관심이 많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려면 제도가 좀 더 갖춰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최근 화두가 되는 디파이에 대해서 "완벽한 C2C(이용자 간 거래)는 어렵기 때문에 은행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본다"며 관심을 드러내면서도 "제도가 좀 더 갖춰져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문 디지털자산 금융 전문 업체들도 한국에서 사업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암호화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대중도 블록체인은 발전시켜야 하는 기술, 암호화폐는 억제해야 하는 투기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디지털자산 금융 업체 델리오의 정상호 대표는 "디파이를 또다른 광풍이나 투기로 보는 시각 많은데 이는 디파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디파이는 내가 가진 자산을 굴릴 수 있는 금융 상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디지털자산 기반 금융이 기본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경쟁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빠르게 법제도를 정비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대상은 국내 기업들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이다"며 "나중에 법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가 경쟁력을 잃기 쉽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장자산 독립법을 만들어 가상자산 금융 상품을 허용하고, 소비자와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금법 제정을 주도한 김병욱 의원은 이날 영상 메시지를 통해 업권법 마련을 위해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의원은 "특금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가상자산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러한 신뢰 획복을 바탕으로 가상자산 산업이 4차산업혁명과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성장잠재력이 높은 주요 산업 분야 중 하나로 재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금법에서 멈추지 않고 가상자산 및 관련 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가상자산 투자자 및 이용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 마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