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짧은 글짓기’나 ‘끝말 잇기’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제시된 키워드를 이용해 재빠르게 문장이나 단어를 만들어내는 게임이다. 순발력이나 어휘력 증강에 꽤 도움이 됐던 기억이 있다.
한국 언론에도 ‘짧은 글짓기’가 유행하고 있다. 키워드는 '실시간 인기 검색어'다. 실검에 뜬 단어를 갖고 온갖 기사를 만들어낸다. 인기 검색어 상단에 기사가 노출되면 엄청난 트래픽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를 ‘검색 어뷰징’이라고 부른다.
중소 인터넷 매체 뿐만이 아니다. 소위 '유력 매체'란 곳에서도 노골적인 검색 어뷰징을 서슴지 않고 있다.
물론 검색어를 활용한 모든 기사를 ‘어뷰징’이라 비난할 순 없다. ‘검색어 최적화’는 인터넷 콘텐츠 전략의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관심 갖는 정보를 재빠르게 제공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순 없다. 문제가 되는 건 ‘짧은 글짓기’ 같은 함량 미달 기사다. '전할 정보'가 아니라 '눈길 끄는 키워드' 때문에 쓰는 기사다.
검색 어뷰징이 횡행하는 데는 포털의 운영 방식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검색어’는 강하게 표출되는 반면, 그 검색어 기사를 쓴 매체는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 제목 밑에 해당 언론사가 표시돼 있긴 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눈에는 ‘뜨거운 키워드’를 담은 유혹적인 제목이 먼저 눈에 띄는 구조였다.
그런데 네이버가 이 구조를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달라지는 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언론사명 콘텐츠 최상단에 표출
둘째. 언론사 로고 함께 노출
셋째. 출처 영역 클릭하면 해당 언론사 홈으로 연결.
밑에 있던 언론사명을 상단으로 올려서 좀 더 잘 보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언론사 로고까지 박아서 출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런 변화는 독자와 언론사 모두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독자 입장에선 검색 때도 브랜드를 의식한 뉴스 소비를 할 수 있다. 평판에 따라 눌러볼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를 구분하는 게 좀 더 수월해지게 된다.
언론사 입장에선 ‘평판 관리’에 대한 책임감이 좀 더 커지게 된다. 해당 언론사명이 전면 배치되고, 로고까지 박혀 있는 공간에 함량 미달 검색어 기사를 쏟아내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브랜드 평판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국 언론의 아픈 생채기 '검색 어뷰징'…이번엔 줄어들까
한국 언론 역사에서 포털은 늘 중요한 상수 역할을 했다. 2003년 무렵을 기점으로 인터넷 언론의 주도권은 포털로 넘어갔다. 그 때 이후 뉴스 소비에서 '언론사 브랜드'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다. "A신문에서 봤다"고 말하는 대신 "네이버에, 혹은 다음에 기사가 떴더라"는 말이 더 익숙해졌다.
검색 공간은 이런 현상이 더 심했다. 아예 브랜드가 사라진 공간이었다. 그러다보니 특정 키워드를 찾아온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채기 위한 온갖 꼼수가 횡행했다.
검색 어뷰징의 계기가 된 건 ‘네이버의 선의’였다. 2006년 언론사와의 상생 전략의 일환으로 도입한 뉴스 검색 아웃링크 서비스 이후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선한 의지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 때 이후 15년 동안 ‘검색 어뷰징’은 한국 언론의 아픈 상처였다. 품질 관리 안되는 함량 미달 기사를 과잉생산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됐다. 지난 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국 사태나, 최근의 박원순 시장 사건 같은 경우 상식 이하 기사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 결과 건전한 공론 공간은 사라지고, '키워드'만 앞서는 부작용이 극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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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어 공간에 키워드보다 브랜드를 앞세우기로 한 네이버의 결정을 환영하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언론사에 좀 더 큰 책임감을 부여하고, 독자들의 선택권을 더 존중해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모쪼록 이번 변화를 계기로 한국 언론의 아픈 자화상인 ‘짧은 글짓기식 어뷰징 기사’가 자취를 감췄으면 좋겠다. 뉴스 소비 공간에도 반칙과 꼼수보다는 ‘정도’가 우선하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