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빌 게이츠 '코로나19 음모론'과 탈진실 시대의 슬픈 자화상

가짜뉴스 좀 더 정교하게 톺아보기

데스크 칼럼입력 :2020/05/26 16:33    수정: 2020/10/05 13:42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가짜뉴스(fake news)가 일상 용어가 됐다. 원래 정의는 ‘뉴스로 가장한 허위조작정보’다. 하지만 이젠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는 전부 ‘가짜뉴스’로 몰아간다. 어느 새 정치적 용어가 돼 버렸다.

가짜뉴스 현상은 탈진실 시대의 산물이다. ‘탈진실’이란 참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그 결과 대중들은 진실이 아닌 정보에도 쉽게 넘어간다.

이 단어가 널리 사용된 건 2016년부터다. 그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 같은 굵직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쟁점이 되면서 비슷한 혼란을 겪었다.

가짜뉴스와 탈진실의 표면적인 피해는 ‘허위조작 정보 범람’이다. 하지만 더 큰 피해는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 황당한 음모론에 귀 기울이게 된다.

(사진 제공=픽사베이)

코로나19 정국에서 가장 황당한 뉴스 중 하나는 ‘빌 게이츠 음모론’이다. 빌 게이츠 음모론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빌 게이츠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그리곤 그걸로 돈을 벌고 있다.

둘째. 빌 게이츠가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뒤 사람들에게 칩을 심으려 한다.

둘 모두 황당한 음모론이다. 특히 두 번째 음모론은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같은 세계정복 단체와도 연결된다. 빌 게이츠가 프리메이슨 같은 단체의 큰 손이란 음모론이다.

그런데 이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미국에선 공화당 지지자들의 40% 가량이 ‘빌 게이츠의 코로나19 음모론’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야후뉴스와 유거브가 미국 성인 1천640명을 조사한 결과 폭스뉴스를 주로 시청하는 사람 중 절반 가량이 빌 게이츠 음모론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공화당 지지자나 2016년 대통령 선거 때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 역시 이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44%에 달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 중 빌 게이츠 음모론이 거짓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26%에 불과했다.

■ 표면적 진실 뒤에 숨은 악의적 의도, 더 큰 문제

이런 결과는 단순하게 볼 사안이 아니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면 맞을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절반만 ‘그렇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 음모론이 꽤 그럴듯하게 먹혀 들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신 풍조가 생긴 것일까? 가짜뉴스 때문이라고 퉁 치는 건 쉽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오히려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해버릴 우려가 있다. 그보다는 정보 생태계 전반의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가짜뉴스(fake news)'라고 쉽게 얘기한다. 그래서 허위 조작 정보만 문제 삼는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오히려 이 문제를 좀 더 세분화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정보 무질서(information disorder)'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Disinformation (허위조작정보)

둘째. Misinformation (잘못된 정보)

셋째. Mal-information (악의적 정보)

허위조작정보는 정보 유포자가 ‘허위’란 사실을 인지하면서 악의적으로 유포하는 것을 뜻한다. 가짜뉴스는 이 범주에 해당된다.

반면 잘못된 정보는 유포자가 허위란 사실은 모른다. 언론이 범하는 (선의의) 오보가 대표적인 잘못된 정보다. 결과적으로 오보는 대중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

정보 무질서 개념도 (사진=유네스코)

악의적 정보는 조금 다르다. 정보 자체는 진실이다. 그런데 알 권리 차원에선 굳이 보도할 가치가 없는 정보를 유포하는 경우다. 공인의 사생활 침해나,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소지가 많은 정보다. 언론들이 특정인을 망신주려는 ‘악의’를 갖고 사소한 정보를 뻥튀기 보도하는 관행이 여기에 해당된다.

잘못된 정보는 악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보도다. 대중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 따라서 오보를 바로 잡으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첫째와 셋째 경우다. 악의를 갖고 정보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탈진실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관행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수용자들의 미디어 신뢰도도 동반하락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황당한 뉴스에 쉽게 넘어가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다시 빌 게이츠 음모론으로 돌아가보자. 사실 빌 게이츠 음모론은 좀 황당하다. 특별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코로나19 발원지인 우한 연구소가 빌 게이츠의 지원을 받은 적 있다는 정도다. 오히려 빌 게이츠는 몇 년 전부터 '팬데믹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적극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럼에도 폭스뉴스를 주로 시청하는 미국인 절반 가량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남의 나라 얘기지만 간단히 볼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미국에 비해 언론의 신뢰도가 더 낮은 편이다. 그런만큼 각종 허위 정보나 음모론이 쉽게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언론을 가장한) 가짜뉴스 때문’일 수도 있다.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기술이 결합되면서 허위정보를 쉽게 생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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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한 부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정보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세 가지 관행을 거듭 되풀이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에서 ‘빌 게이츠 음모론’이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소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탈진실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 해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