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봄을 부르는 소설 ‘자작나무 아래로 내리는 눈’

시나리오 작가 문희융의 장편소설

일반입력 :2020/04/20 16:02    수정: 2020/04/20 18:01

봄날이 한창인데 코로나19로 일상은 여전히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사사로운 감정들마저 ‘자가격리’된 채 우연히 읽게 된 책이 바로 '자작나무 아래로 내리는 눈'(문희융, 그룹에이치컴퍼니) 장편소설이다. 작가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까닭인지 생생하고 섬세한 감정 묘사, 큰 사건이 없는데도 그 다음 전개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잠시 죽어있던 감정과 일상의 의욕들이 되살아나는 듯한 묘한 활기를 되찾아준 책이라 평하고 싶다.

주인공 한명호는 건축가이자 대학교수다. 대학시절 첫사랑을 놓친 아픈 기억을 가진 그는 결혼 적령기가 꽤 지난 후에도 과거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 못한 채 지낸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한테도 불편한 감정이 깊숙이 쌓여있다.

그러다 대학시절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러시아 문학 수업의 교수의 권유로 세미나 참석차 모스크바로 향한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우크라이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새로운 인연 나타샤를 만나게 된다.

명호와 나타샤가 러시아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24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호텔 라운지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짧게 얘기를 나누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는 기차에서 우연히 재회한 시간, 그리고 명호가 비행기 타기 전 7시간 동안 함께 한 시간이 전부다. 그럼에도 둘은 같은 한국인이란 것 이상으로 서로의 말과 마음에 공감하고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엔 갑작스럽고 짧은 만남이라, 각자의 지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터라 주저하고 망설이다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고 헤어진다. 둘 다 눈감고 찍은 사진만 나타샤 폰에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1년여 가까이 끊겨 있던 둘의 인연은 미하일이라는 나타샤 동료에 의해 다시 이어질 기회를 찾는다. 한 때 무대 위 주인공이었으나 은퇴를 고민하던 나타샤에게 미하일은 그녀를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했고, 이를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명호란 존재가 죽어가던 나타샤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 명호에게 자신이 촬영한 나타냐 다큐멘터리 영상을 이메일로 보낸 것이다. 영상을 통해 얼마나 그녀가 명호를 그리워하는지, 그 덕분에 접으려 했던 꿈을 다시 움켜쥐었는지 보여주고 명호의 용기 있는 결단을 기다린다.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죠?"란 말과 함께.

그럼에도 주저하던 명호의 마음을 이끈 건 바로 김 교수다. 러시아 세미나 참석 권유로 인연의 끈을 만들어줬던 김 교수는 명호와 함께 별안간 자작나무숲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나무 위에 쌓여있던 눈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눈을 흠뻑 뒤집어 쓴 명호는 제 스스로 털어내지 못하고 쌓인 눈(상처)을 김 교수가 흔들어 떨어뜨려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제야 지난 자신의 아픔을 덜게 된다.

이 소설 배경으로는 제목에 나온 자작나무숲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자작나무숲부터, 모스크바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면서 명호와 나타냐사 창밖으로 보게 되는 자작나무숲, 그리고 명호가 나타냐를 만나러 떠나는 시베리아의 자작나무숲까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 마치 은은한 나무향이 들숨을 통해 가슴까지 스며오는 기분이다. 이제 막 더위가 찾아오는 봄의 중턱에서 시원한 나무 그늘과, 나뭇잎을 비비며 달려오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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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은 주인공 한명호가 어머니를 잃은 아픔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쌓고, 첫사랑도 만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아픈 추억을 갖게 되는 슬픔의 공간이다. 또 반대로 자작나무 아래로 내리는 눈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털어내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는 희망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내 어깨에 수북이 쌓인 눈도 자작나무숲에 가면 털어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