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색 사업은 철저히 실패했다. 라인이라는 메신저를 성공했던 건 사람, 팀의 힘 덕분이었다. 고생스러워 철수하고 싶기도 했지만, 같이 했던 팀들의 열정이 있어 그만두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 2019년 6월)
“밖에서 보면 네이버가 자본도 있어 보이지만 글로벌 회사들과 대응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 훌륭한 개발자뿐 아니라, 경쟁력 있는 기술과 서비스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것들이 얽혀 있어 (글로벌 기업들과) 쉽지 않은 싸움이 시작될 거라 생각한다. 절박하지만, 이걸 버티지 못하면 3년 뒤 네이버는 어떻게 될까 고민이 크다.”(한성숙 네이버 대표, 2017년 3월)
일본을 비롯해 태국 등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모바일 메신저 ‘라인’의 성공으로 글로벌 기업의 타이틀을 얻은 네이버의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또 한 번 큰 결단을 내렸다.
일본 시장에서 포털 서비스로 두 번의 고배를 마시고도 라인을 끝내 성공시켰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가깝고도 먼 일본의 소프트뱅크와 힘을 합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일본 시장에서는 두 회사가 강력한 경쟁사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든든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이해진 GIO의 승부수 기질이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이해진 GIO를 비롯해 한성숙 네이버 대표 등이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경쟁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절박한 생존전략’으로 읽힌다.
■ 소프트뱅크 손잡는 네이버...“쉽지 않은 싸움” 대비
18일 네이버 라인은 야후재팬을 자회사로 둔 Z홀딩스와 경영통합에 관한 기본 합의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소프트뱅크는 Z홀딩스 주식을 40% 이상 보유중이고, 네이버는 라인 주식을 70% 이상 보유중이다. 네이버와 소프트뱅크는 50:50으로 조인트벤처 합작사(지주사 개념)를 세우고, 그 아래 중간 지주사격인 Z홀딩스가 라인을 비롯해 야후재팬, 재팬넷뱅크 등을 운영하는 구조를 짜기로 했다.
라인은 이번 합작법인 설립을 통해 Z홀딩스와 핀테크 영역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신규 사업에 진출해 미래 성장을 도모한다. 또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한 투자로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들과도 경쟁한다는 전략이다.
이런 표면적인 이유 말고도 이번 합병 결정 배경에는 ‘글로벌 시장에서 겪고 있는 녹록치 않은 경쟁 환경’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이해진 GIO를 비롯해 네이버 경영진들이 입버릇처럼 토로했던 바다.
2017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해진 GIO는 네이버의 검색 광고 독과점 비판에 “구글은 검색 점유율 90%, 페이스북은 SNS에서 100%”라면서 “전체 인터넷 점유율을 놓고 따져야지 네이버가 국내에서 70% 점유율을 지키고 있는 것만 보면 안 된다”는 말로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에서 한국 기업의 초라한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한성숙 대표 역시 지난 2017년 3월 대표 취임 후 기자들과의 첫 공식 자리에서 AI 서비스와 자율주행차 등의 새 결과물들을 나열하면서도 “당장의 성과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평가를 한 바 있다.
당시 그는 “현실적으로 (글로벌 기업들과) 쉽지 않은 싸움이 시작될 거라 생각한다”면서 “마음에 드는 속도와 수준대로 지금 네이버가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소 절박함이 든다”는 말로 글로벌 경쟁 환경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 미래 먹거리 준비할 중단기 성장 전략 필요한 네이버
네이버는 우여곡절 끝에 일본과 태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 가파른 성장을 이뤘지만, 지역확장을 통한 이용자 확보에 있어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다.
또 3~4년 전부터 이해진 GIO가 프랑스로 직접 건너가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섰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지난 2017년 프랑스 그르노블에 위치한 제록스리서치센터유럽(현 네이버랩스유럽)을 인수, AI와 로봇 등 최첨단 기술력과 인재를 확보했지만, 이 역시 미래를 내다 본 투자에 가깝다.
회사 입장에서는 4차산업혁명시대를 맞아 미래를 내다 본 장기적인 전략적 투자도 필요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경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중단기 성장(수익화) 전략도 필요하다. 이에 일본에서 검색 포털 서비스와 이커머스, 결제 시장에서 선두 기업을 가진 소프트뱅크와의 ‘끈끈한’ 협업이 필요했던 셈이다. 네이버 라인이 가진 8천만 사용자와, 5천만 야후재팬 사용자를 기반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거센 침투를 방어한 뒤, 체력을 더 키워 글로벌 공략에 나서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라인 신중호 대표는 지난 6월27일 열린 연례 사업 전략 발표회인 ‘2019 라인 컨퍼런스’에서 “사용자에게 감동을 주는 혁신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라이프스타일 혁신을 이끌어 나가겠다”면서 “사용자들의 일상 전반을 지원할 수 있는 라이프 인프라로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완벽하게 결합하고, 핀테크, AI 등 분야에 전략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었다.
■ 일본서 완전히 실패했던 네이버...“일본 잡고 세계로”
이해진 GIO는 지난 6월 열린 ‘디지털 G2 시대, 우리의 선택과 미래 경쟁력’이란 심포지엄에 참석해 일본에서 검색 서비스로 ‘완전히 실패했던’ 경험담을 털어놔 주목 받았다.
네이버는 2000년 11월 네이버재팬으로 일본에 진출했지만 당시 야후재팬에 밀려 5년 만에 현지 사업을 철수했다. 2007년에 다시 네이버재팬을 재설립하며 다시 한 번 검색 포털 시장에 도전장을 냈지만 이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 라인이 성공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해진 GIO는 2011년 일본 대지진 당시 현지에서 근무 중인 직원들의 안전을 고려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도, 현지에 남은 절반의 직원들과 라인을 성공시켰다. 사업의 지속 여부를 놓고 “압박감에 펑펑 울었다”고 말한 이해진 GIO의 판단력이 현재 네이버 라인의 탄생과 성공을 만든 비결이다. 라인의 지난해 매출은 약 2조2천억원이다.
이 GIO는 라인으로 성공한 과거를 회상하며 “사업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정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운이 따라야 한다”면서도 “회사 정책의 투명성과 ‘소신 있는 의사결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었다.
이에 소프트뱅크와의 합작사 설립을 통한 라인과 야후재팬 통합 역시 절벽 끝에 선 이해진 GIO의 소신 있는 결단으로 해석된다. 네이버와 소프트뱅크 측이 밝힌 대표 AI, 간편결제, 이커머스 등 소위 돈 되는 사업에 있어 출혈 경쟁을 줄이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일상 전반을 지원하는 서비스와 사업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종합하면 네이버는 동영상 시장을 유튜브에 내주고, 소셜네트워크 시장을 페이스북에 뺏기면서 미래 먹거리인 AI, 결제 시장을 비롯해 잠재력이 큰 이커머스 시장을 소프트뱅크와 나눠 갖겠다는 뜻이다. 이 같은 사업 전략 밑바탕에는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에서 더 이상 밀리면 회사의 존폐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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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진 GIO는 2016년 10월 열린 ‘데뷰 2016’ 간담회에서 “라인의 성공은 정신과 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이자 행운”이라며 “라인이 성공했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현재, 이해진 GIO는 유럽과 미국에서의 도전에서 또 한 번의 기적과 행운을 실현하고자 전략적 파트너로 소프트뱅크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무기는 1억 명에 가까운 이용자 수, 그리고 양사가 입이 닳도록 강조하고 투자해온 AI 기술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