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노풀로스 "한국, 당장은 암호화폐 효용 적다"…왜?

"중앙금융체제선 불가능한 서비스할 때 진짜 필요할 것"

"현재 한국에서 암호화폐가 필요한가요? 암호화폐가 필요한 분 있나요?"

블록체인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안드레아스 안토노풀로스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곤 곧바로 답을 했다.

"중앙화된 현 금융시스템에선 할 수 없는 애플리케이션이 나올 때에야 한국에서도 암호화폐가 진짜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안토노풀로스는 4일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분산경제포럼(디코노미2019)' 기조 강연을 통해 암호화폐 산업이 어떻게 반전해 나갈지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했다.

안토노풀로스는 블록체인 분야 최고 저술로 꼽히는 '마스터링 비트코인'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날 그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의 미래'를 주제로 발표했다.

'마스터링 비트코인'의 저자 안드레아스 안토노풀로스가 4일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분산경제포럼(디코노미2019)'에 참석해 발표하고 있다.

안토노풀로스는 서두부터 "한국에서 암호화폐가 왜 필요한가요?"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아예 "한국은 현재 암호화폐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굉장히 효율적인 금융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아직도 수표를 많이 사용한다. 여전히 은행을 방문한 뒤 종이에 청구금액을 제출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굉장히 효율적인 금융시스템이 일상화돼 있다.

안토노풀로스는 "한국은 신용카드 등 굉장히 효율적인 금융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암호화폐가) 크게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 건 암호화폐 무용론을 펼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암호화폐가 어떤 쪽으로 진화 발전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위한 밑밥이었다.

안토노풀로스는 암호화폐는 은행 시스템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곳에서 널리 쓰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화폐 가치가 굉장히 떨어지고,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에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즉, 암호화폐가 널리 통용된다는 건 현재의 금융 시스템이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아르헨티나를 들었다. "아르헨티나는 인플레이션이 40%에 달하며, 환율이 매일 바뀌는 등 화폐 가치가 굉장히 떨어진 나라"라며 "환율이 매일 바뀌는 현상은 한국과 미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와 같이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 암호화폐를 수용하고자 하는 이유는 "제도의 실패에서 생존하기 위한 의도"라며 "금융시스템이 완전하게 범죄의 온상이 돼버려 이를 피하려면 암호화폐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마트 컨트랙트 같은 기능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미국 같은 곳에선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땅에 대한 권리,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블록체인에 쓸 것이라고 말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등기소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 자신의 소유권을 쉽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금융·재무 시스템이 굉장히 발달한 나라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걸까. 그는 "암호화폐를 선진국에서 사용하는 이유와 개발도상국에서 사용하는 이유는 다르다"며 "이걸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안토노풀러스는 "환율이 안정되고 금융시스템이 발달한 나라에서 암호화폐를 수용하는 이유는 아르헨티나와는 굉장히 다를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암호화폐는 여러 발전 단계가 있고, 각각의 단계에서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퍼블릭 블록체인은 기존 금융 시스템과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다"며 "암호화폐는 금융상품과 비슷한 역할을 하되 조금 다르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드레아스 안토노풀로스가 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디코노미2019'에서 발표하고 있다.

■ 이메일이 진화하면서 팩스를 대체했듯이…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어떤 발전 과정을 거칠까? 이 질문을 던진 안토노풀로스는 인터넷 발전 단계와 비교했다.

첫 번째 단계는 인터넷이 기존 시스템을 대체하는 단계다. 기존 금융 시스템을 대체하거나, 그와 유사하게 이용되는 단계란 얘기다. 구체적으로 이메일이 팩스 역할을 대신하던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안토노풀로스는 "인터넷 도입 당시 오갔던 많은 논의들은 과연 이메일로 팩스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였다"면서 "당시엔 팩스가 잘 활용되고 있는데, 굳이 인터넷을 사용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당시 사람들은 이메일을 '예쁜 팩스'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전히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금융상품과 유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기존 금융시스템과 똑같은 시스템을 갖추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술은 진전하고 있고 가속화돼 효율성이나 운영 측면에서 (기존 시스템을) 충분히 따라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익숙한 기존 금융시스템도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강조했다.

안토노풀로스가 생각하는 암호화폐의 두 번째 단계는 기존 금융시스템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을 해내는 단계다. 팩스가 못했던 기능을 인터넷이 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는 "현재 금융 시스템은 너무 극단적으로 가고 있다"며 "사람들은 현재 금융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서비스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돈을 다른 나라로 보내고자 했을 때, 현재 제도가 미비하다면 암호화폐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암호화폐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은 기존 시스템을 유사하게 모방하되, 중개자를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라며 "현재의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서두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꺼냈다. 한국처럼 선진적인 금융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 암호화폐가 제대로 꽃피기 위해선 기존 금융시스템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노풀로스는 "기존 금융시스템에서는 할 수 없었던,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서비스를 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온다면 한국은 암호화폐가 필요한 시스템이 될 것"이라며 말을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