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전망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웠지만, 작년보다 이룬 것이 많아 보람찬 해였습니다."
메모리반도체 현업에 종사하는 국내 모 기업 관계자는 지난 한 해를 보낸 소회를 묻자 이같이 답했다.
지난해 말부터 투자 업계로부터 거론된 고점론이 해가 지나면서 그 세가 거세졌지만, 업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전년과 같은 1년을 보냈다. 이는 곧 사상 최대 실적으로 이어졌다.
■ 최대 실적 갈아치운 삼성·SK 반도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와 SK하이닉스는 올해 매 분기 연속으로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영업이익은 올해 ▲11조5천500억원(1분기) ▲11조6천억원(2분기) ▲13조6천500억원(3분기)으로,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이었던 35조원을 일찌감치 넘겼다. SK하이닉스도 ▲4조3천700억원(1분기) ▲5조5천700억원(2분기) ▲6조4천700억원(3분기) 순으로 창사 이래 최고 상승세를 이어갔다. 양사의 합산 점유율은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절반을 돌파했다.
고점론이 무색하게 최고 실적을 끌어낸 건 지난해부터 초호황의 중심에 서 있는 D램 덕이었다. 올해를 기점으로 호황이 사그라들 것이라는 전망을 비웃듯 D램 가격 상승세가 이어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너도나도 데이터센터를 확장하면서 ‘계절적 비수기’라는 단어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는 사실 예견된 것이란 주장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요즘처럼 전 세계적으로 4차산업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수요 폭증과 같은 추세는 업계에서도 충분히 예상해 왔던 것"이라며 "서버를 중심으로 수요가 급증해 상반기와 하반기를 걸쳐 기업 입장에서 안정적인 가격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 증설 경쟁 격화…'메모리 쏠림'은 심화
업계는 고점 논란에 흔들리지 않고 증설 전쟁을 펼쳤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비 증설에 약 30조원을 투입, 앞으로 3년간 10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생산 거점인 경기도 평택캠퍼스의 양산력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 골자였다. SK도 3조5천억원을 들여 2020년까지 경기도 이천 공장에 신규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10월에는 3D 낸드 양산 거점인 청주 M15 공장도 완공됐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메모리 쏠림' 현상은 올해 더 심화됐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상반기 국내 반도체 업계의 메모리반도체 수익 비중은 60%에 달했지만, 시스템 반도체 비중은 3%에 불과했다. 시스템 반도체의 양대 축인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와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의 성장을 위한 기술 개발, 그리고 인력 양성에 정부와 업계·학계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7월엔 반도체 산업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까지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비를 매년 삭감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가 편성한 반도체 분야 R&D 사업비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적게는 연간 21억원, 많게는 205억원 규모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부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현실로 다가온 올해 들어서야 전년 대비 30억원을 더 얹은 344억원의 예산을 증편했다. 업계는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주력 산업인데도 정부의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고 쓴 목소리를 냈다.
■ SK 품에 안긴 도시바…'세기의 M&A'는 줄줄이 무산
인수합병(M&A) 시도도 치열했던 한 해였다. SK하이닉스가 속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은 지난 5월 도시바 반도체 사업을 인수하면서 메모리 시장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번 인수로 SK하이닉스는 낸드 업계 2위인 도시바와의 기술 협력을 통해 시장에서의 입지를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 다만, 투자 조건으로 참여한 SK가 향후 어느 정도의 이윤을 얻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M&A가 될 뻔한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무산됐다. 지난해 11월부터 세계 최대의 통신용 칩 업체인 퀄컴에 인수 의사를 타진해 온 브로드컴은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 보안’이라는 산을 넘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반대로, 퀄컴의 NXP 인수 시도는 반도체 최대 수요국인 중국이 허락하지 않아 좌절됐다. 통신칩 업계 1위 퀄컴이 글로벌 3대 차량용 반도체 업체 NXP를 440억 달러(약 49조원)에 인수하겠다는 계획은 한때 '세기의 거래'로 불렸지만, 결국 미-중 무역갈등의 희생양이 됐다.
■ 기술개발 一路…초격차 이뤘다
올해 초 삼성전자는 10나노급(1x) 공정을 적용해 업계 최초로 18Gbps 속도를 구현하는 'GDDR6 D램' 시대를 열었다. 삼성은 2월 PC용 DDR5 D램을 첫 개발했고, 7월엔 5G 스마트폰과 모바일 인공지능(AI) 시장을 주도할 '10나노급 8기가비트(Gb) LPDDR5 D램'도 최초로 개발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달 세계 최초로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 규격을 적용한 '2세대 10나노(1y·중반대) 16기가비트(Gb) DDR5'를 개발, DDR5 대열에 합류했다.
파운드리를 주축으로 글로벌 반도체 기술개발 경쟁 역시 끊이지 않았다. 업계 1위인 대만 TSMC가 삼성과의 7나노 양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춤했던 미세공정 기술력 제고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삼성전자는 최초로 7나노 공정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도입하는 기술 초격차 전략을 펼쳤다. SK하이닉스도 EUV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5G 시대 개막을 앞두고 모바일 AP와 모뎀 경쟁도 치열했다. 삼성전자는 올 초 '엑시노스 9810' 양산 이후 열 달 만에 차기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10 시리즈에 탑재될 '엑시노스 9820'을 지난 달 공개했다. 삼성은 5G 모뎀인 '엑시노스 5100'도 최초로 양산 중이다. 이에 질세라, 퀄컴도 지난 5일 첫 5G 이동통신 상용 플랫폼인 '스냅드래곤 855'를 발표하며 5G 리더십을 이끌겠다고 강조했다.
■ '中 굴기' 복병은 인력 빼가기…내년 메모리 '上低下高' 전망
중국의 메모리 굴기도 그 어느 때보다 거센 한 해였다. 연초부터 중국이 올해 국내 업계보다 더 많은 시설투자를 단행할 것으로 전망되면서다. 그러나 중국이 올해 반도체 왕좌에 오르기엔 한국이 쌓아 올린 '기술 격차'가 너무 거대했다는 분석이다.
이는 중국이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내 업계에 포진된 '인력 빼내기' 편법에 집중하는 상황을 연출해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중국 반도체 업체에 취직한 국내 인력은 약 1천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이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높이기 위해선 수십만 명이 더 필요한데, 이를 국내 업계로부터 충원할 가능성도 제기된 상황.
내년 메모리 시장 전망에 대해선 현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대체로 '상저하고(上低下高·상반기엔 낮고 하반기로 갈수록 높아진다)' 패턴이 예상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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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연말(4분기)부터 내년 초(1분기)까지 메모리 공급이 확대돼 수급이 일시적으로 주춤했다가 이후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올해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연초 대비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완화되고 있어서다.
삼성전자는 "내년 하반기로 갈수록 수요 증가 폭이 공급 증가를 웃돌아 수급 개선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공급 부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뤄졌다면, 내년은 수요 불확실성이 많은 만큼 연간보다는 분기별로 계획을 수립해 유연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