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이 따로 있는 이유

[이균성 칼럼] 양보와 배려의 품격

데스크 칼럼입력 :2018/08/13 16:59    수정: 2018/11/16 11:17

언젠가부터 지하철에 임산부 자리가 생겼습니다. 며칠 전 퇴근길이었죠. 이 자리가 비어있고, 모두 눈치를 보는 듯 했습니다. 얼마간 아무도 앉지 않았죠.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그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앉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바짝 다가 서 있습니다. 그때 한 어르신이 젊은이를 약간 밀치며 앉으려 했습니다. “노약자 석에 앉으셔도 될 텐데요.” 젊은이는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은 뻘쭘하게 잠깐 옆에 서 있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젊은이가 내릴 때까지 열 정거장 정도가 지나치는 동안 두어 명이 그 자리를 탐하다 어르신처럼 결국 물러나고야 말았죠. 그런데 이 젊은이가 내리고 나서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참은 비어 있었죠. 마침내 그 옆자리가 같이 비었고 두 자리가 되자 젊은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어르신을 막아설 때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태도가 당돌하기도 했거니와 어르신이나 임산부나 자리를 양보 받아도 좋을 사람들일 터인데 노약자 자리와 임산부 자리를 굳이 구별하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궁금했던 거죠. 젊은이가 여성이고 어르신이 남성이어서 그랬을 거라는 짐작을 해봤습니다. 평소 꼰대에 대한 반감이 있고, 그래서 극구 막아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거죠.

이 생각은 틀렸습니다. 이후 그 자리를 탐하신 어르신 두 분은 모두 여성이었고, 앞의 남성 어르신보다 더 노쇠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임산부와 비교해도 누구한테 먼저 양보해야 좋을지 고민해야 할 만큼 충분한 노약자로 보였습니다. 그래도 비켜주지 않았죠. 또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비켜주지 않은지 너무 궁금해 묻고 싶었지요. 십중팔구 비어갈 자리인데 왜 극구 막은 걸까요.

그 결과도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르신들은 뻘쭘하게 양심 없는 존재가 되어 옆으로 밀려나 씁쓸하게 어떤 정거장에서 퇴장했고, 그 젊은 여성은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수는 없는 일이어서, 결국 어르신들보다 훨씬 팔팔한 젊은 두 남녀의 차지가 되고 말았지요. 물론 이 두 남녀는 그 현장을 지켜보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근처로 왔고 아무 부담 없이 나란히 앉게 되었지요.

그 심리가 너무 궁금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임산부에 대해 더 정확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시위 아닐까. 애초에 그 자리를 비워놓으면 임산부가 미안해하지 않고 앉을 거 아냐. 그런데 먼저 앉아 놓고 비켜주면 미안해해야 하잖아. 어르신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젊은 임산부들은 그것까지 미안해하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막아주고 싶은 갸륵한 마음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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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와 배려에도 여러 품격이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이를 테면 정치인의 양보가 가장 품격이 낮아 보입니다. 계산적이니까요. 다음에 꼭 받아내기 위해 양보하는 것이겠지요. 나중에 받아낼 마음은 없다 해도 널리 알려진 양보와 배려도 품격이 높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양보 받은 자를 머쓱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상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양보와 배려는 어떤가요. 그게 최상이겠죠.

앞으로 지하철 탈 때마다 임산부석이나 노약자석을 자주 둘러보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