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Steward’는 우리말의 집사로 번역된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국민에게도 집사가 있다. 국민연금이 그것이다. 노후자금을 책임지는 집사다. 국민연금은 주로 기업에 투자되는데 그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다. 국민연금은 이를 위해 30일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키로 했다. 이 코드는 집사처럼 연금을 잘 운용하기 위한 지침이자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그렇지만, 사실은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점이 중요하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기업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면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해서 예외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영 참여는 배제가 원칙이지만, 국민연금의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의결하면, 경영 참여를 할 수 있다.
기업가치가 훼손되면 당연히 연금의 투자 수익률이 떨어진다. 국민의 노후자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럴 때는 경영에 관여하겠다는 것이다. 또 오너의 행위가 지나치게 반사회적일 때도 마찬가지다. 최근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과 탈세 의혹이 대표적이다. 사회 문제로 비화하고 불매 운동이 일어나면서 기업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이럴 때 해당 임원의 해임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국내 기업에 미칠 영향은 지대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투자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위상은 그만큼 크다. 국민연금은 주식에 투자하는 세계 3대 기금 중 하나로, 지난 4월말 기준 국내 주식시장에서 굴리는 자금만 635조 원이다. 전체 자금의 7%다. 특히 포스코와 네이버 그리고 KT에서는 1대 주주다.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기업도 수두룩하다. 삼성전자 지분도 10%에 육박한다.
취지는 좋지만, 실제 운용 여부에 따라 결과가 판이해질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이 제도를 놓고 기업과 시민사회단체가 대립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강화된다는 쪽은 이 제도가 오너의 탐욕을 실질적으로 견제해 기업 운영의 건전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반대하는 쪽은 국민연금을 ‘나쁜 시어미’ 쯤으로 본다.
왜 ‘나쁜 시어미’로 볼까. 우선 간섭을 하기에는 국민연금 기금운영위가 경영 비전문가라는 데 있다. 비전문가가 자꾸 트집을 잡을 경우 경영에 차질을 빚고 기업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거다. 또 정부가 개별기업의 경영에 간섭하는 통로로 변할 우려도 있다. 경영참여 여부를 판단해야 할 기금운영위원회(위원장 보건복지부 장관)가 정부의 입김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투자를 해놓고 ‘강 건너 불구경’만 하는 것도 문제다. 오너 일가 문제로 기업가치가 뚝뚝 떨어져도 핵심 주주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그 또한 문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없지 않다. 국민연금은 최근 오너 일가 갑질과 밀수 및 탈세 의혹으로 기업가치가 심대하게 훼손되자 대한항공 측에 2대 주주의 입장에서 공개서한을 보내며 주주권리를 행사했지만 사실상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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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도는 결국 ‘불신’ 속에 태어난 ‘필요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오너의 선의를 믿지 못하니 큰 투자자인 국민연금을 통해 견제하자는 것이고, 기업은 그 간섭이 관치 등의 부당한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다행히 양측은 일상적인 경영 참여는 배제하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기금운용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양쪽의 불신이 여전히 강력하게 대립하지만 그 불신이 더 커지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 셈이다. 어찌 됐건 이 제도는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미국 일본 영국 등 세계 20여 개 나라에서 이미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이번 합의와 제도 도입이 불신은 줄이고 신뢰는 키우는 과정이었으면 한다. 경제 주체 사이의 과도한 불신은 사회적 비용을 늘릴 뿐 성장에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