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에는 사람이 동물을 무시하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숭배의 대상이었다. 3만5천년 전 그려진 인류 최초의 그림인 ‘쇼베 동굴’에서 발견 된 그림을 보면 사자, 코뿔소, 곰, 표범 등이 마치 숭배하듯이 그려져 있다.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 원시 신앙은 동물을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로 신처럼 보시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농업 혁명은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동물을 신의 영역에서 도구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도구의 끝엔 가축이 있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길들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한 노동을 때려가면서 시켰다.
말은 인간을 위해 계속 달려야 했고, 양은 인간을 위해 젖을 계속 짜야 했다. 기술은 발달할수록 가축의 도구화는 더욱 길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몸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서 새끼를 낳고 젖을 빨리다 제 명에 못 살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가축만 인간의 이익을 위해 혹사 당한 것이 아니었다. 야생 동물은 귀족의 취미 생활을 위해 사냥개에게 쫓기다가 결국 총에 맞아 죽는 경우가 많았고, 요즘에는 야생 동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다. 그 어디에서도 과거 동물이 인간에게 받던 존중은 찾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인간이 동물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대접해도 좋다는 근거는 없다. 단지, 인간이 동물보다 더 똑똑해 졌기 때문이다.
■ 로봇이 인간을 가축처럼 만든다면…
인공지능을 반대하는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것이 단지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수준이 아니다. 인간이 가축화 되거나 멸종 될 수 있다는 우려감까지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단지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공 지능이 우리보다 훨씬 똑똑해질 경우 우리가 동물의 동의를 받지 않고 동물을 가축화 시키거나 멸종 시킨 것처럼 인공지능이 우리를 가두고 때리고 죽이는 가축으로 대하거나 멸종 시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인간 중 누가 할 수 있냐고 주장한다.
새천년을 여는 2000년 4월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지털 전문 잡지인 '와이어드'는 ‘왜 미래는 인간이 필요하지 않은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란 도발적인 칼럼으로 세계적인 논쟁거리를 만들었다. 가까운 시간 내에 기술이 발전해 인간은 기술의 지배를 받거나 심할 경우 기술의 역습으로 멸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디지털 기술에 매우 우호적인 디지털 전문 잡지에 이런 글이 실린 것이 이례적인 사건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디지털 기술을 반대하는 인문학자, 환경론자 혹은 시민단체 관련자가 아닌 디지털 기술을 최선두에서 이끌어가는 IT 리더의 칼럼이었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이 칼럼을 쓴 사람은 빌 조이(Bill Joy)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정보기술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회’의 공동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 창업자로 IT 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전 세계 IT 업계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 칼럼 이후 빌조이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비슷을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도 ‘사피엔스’라는 저서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호모 데우스’를 보면 인공지능이 우리를 멸종을 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온다.
뉴튼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이야기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도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자주했다. “생각하는 로봇 개발을 위한 완전한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지 모른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초기 인공지능 기술은 유용성을 충분히 입증했다면서도 인간 능력에 필적하거나 이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밝혔다. 사람의 진화는 매우 느리나 기술은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기계가 우리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간의 가축화 혹은 인간의 멸종을 우려하는 주장의 근거는 비교적 간단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던 동물계에서 최고 자리를 두고 아름답게 공존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최고 자리를 두고 경쟁하다가 최고가 결정되면 나머지 종은 철저하게 다스려지거나 멸종한 것이 그간 동물계에서 발생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 모두가 돈 많은 백수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리며…
그럼, 이처럼 위험한 인공 지능은 왜 개발하는 것일까? 기업이 돈 벌기 위해? 편하게 노래 듣기 위해? 정답이다. 하지만 조금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조금 길게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불과 몇 백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의 공포, 병으로 인한 사망, 굶어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늙어 죽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삶이 공포 영화였고, 공포영화가 삶으로 조금이라도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신에게 의지해야 했다. 하지만, 신이 인간 세상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았다.
인간 스스로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지금에는 너무나 당연한 이런 생각을 발명을 한 사람은 ‘토머스 모어(1478~1535)’였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 제목만 외웠던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그는 인간의 이성과 덕성을 통해 우리 세상을 더 발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보이지 않는 제도를 잘 개발하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 대단한 발명이었다.
하지만,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그도 풀지 못한 한가지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일은 조금만 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지만 그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유토피아도 노예 제도는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평등하고 하고 싶은 일만 조금 하는 사회가 결코 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도 누군가는 하기 싫은 일을 매우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죄를 진 노예는 가혹한 노동을 해야하고, 부족하다면 외국에서 노예를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과거에 비해 평등하게 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저임금을 받고 일을 하고 있고, 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 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데리고 오고 있는 현실과 비슷하다.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은 왜 인간지능을 개발해야 하는지 대충 짐작을 하실 것이다. 인간지능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상은 ‘뢰브너상 (Loebner PRize)이다. 흔히 튜링테스트라고 하는 경진대회로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판별하고자 하는 테스트로, 1950년 컴퓨터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이 제안한 방법이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와 채팅을 해서 사람과 구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대화가 자연스러우면 상을 받는다. 이 상을 만들고 후원하고 있는 백만장자인 뢰브너 박사가 인공지능을 발전 시키기 위해 상까지 만든 이유는 인공지능이 우리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토머스 모어가 해결하지 못한 딜레마를 인공지능 로봇이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발달 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입장이 아니다. 일은 인공 지능 로봇이 하고 인간은 행복하게 놀기만 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 백수가 가장 좋은 직업이기에 로봇 이상주의자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로봇이 일은 다 하고 우리는 놀고 먹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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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로봇이 일을 통해 얻는 수익에 세금을 내게 해야 한다. 로봇이 세금을 낸다는 것이 황당해 보일 수 있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니다. 원시적인 인공지능 로봇인 자동판매기도 법적으로 자영업자로 세금을 낸다. 단, 자동판매기 대신 주인이 낸다. 인공지능 로봇이 직접 세무서에 세금을 내던 로봇 주인이 대신 세금을 내던 이 세금으로 인간이 편하게 베짱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인공지능 이상주의자들의 꿈이 현실이 된다.
유럽은 이미 ‘로봇세’등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사회적 논의를 하고 있다. 국내는 아직 이런 논의가 부족하다. 인공지능 스피커 경쟁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발전으로 발생 할 수 있는 사회적 영향과 대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