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잡지 포천은 매년 세계 최고 지도자 50명(World’s Greatest 50 Leader)을 선정한다. 경제잡지답게 최근 2년 동안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와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를 1위 자리에 올려놨다.
그런데 2017년엔 의외의 인물이 선정됐다. 테오 엡스타인. 시카고 컵스 야구단 사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깐깐한 포천이 왜 야구단 사장에게 ‘세계 최고 지도자’란 영예를 선사했을까?
물론 엡스타인은 미국 야구계에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2002년 약관 28세 나이로 명문 구단인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인 2004년 보스턴 팀에게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선사한다. 86년 동안 이어진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밤비노의 저주’는 서막에 불과했다. 엡스타인은 2011년 말 시카고 컵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5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108년 묵은 ‘염소의 저주’마저 깨는 데 성공했다. 미국 프로스포츠의 대표적인 저주 두 개를 해결하면서 ‘저주 파괴자’(Curese Breaker)란 별명까지 얻었다.
물론 포천이 겉으로 드러난 성적만으로 엡스타인을 ’세계 최고 지도자’로 꼽은 건 아니다. 꼴찌팀 시카고를 5년 만에 리그 최고 강자로 변신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탁월한 지도력과 비전 때문이었다.
특히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보스턴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스턴 팀은 엡스타인이 단장으로 취임할 무렵에도 이미 강자였다. 하지만 시카고는 2011년 엡스타인이 사장으로 취임할 땐 시즌 100패를 밥먹듯 하던 꼴찌팀이었다.
엡스타인은 이 팀을 차근차근 재건하면서 ‘지속가능한 강팀’으로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은 야구팀 뿐 아니라 IT기업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의 야구 전문 기자인 톰 버두치가 최근 출간한 ‘컵스 웨이(Cubs Way)’란 책을 중심으로 엡스타인의 ‘저주 탈출 비법’을 정리한다. 버두치가 책 제목으로 사용한 ‘컵스웨이’는 시카고 컵스 팀의 내부 매뉴얼 제목이기도 하다.
1. 장기적 관점으로 지속가능한 시스템 구축
시카고 컵스처럼 우승에 목마른 팀은 ‘조급증’에 걸리기 쉽다. 그러다보면 눈앞의 실적 때문에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 ‘한번 우승’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엡스타인은 달랐다. 그는 5년 내에 ’꾸준한 강팀’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첫 단계가 ‘팀의 방향을 바꿀 영향력 있는 선수’(impact player)를 최소한 네 명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는 당시 다른 팀들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강력한 투수를 선호한 다른 팀들과 달리 엡스타인은 ‘젊은 타자’ 위주로 팀을 재편했다. 매일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투수보다는 타자들이 좀 더 안정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최근 투구 속도가 빨라지면서 투수들은 부상 위험이 좀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따라 앤소니 리조, 크리스 브라이언트, 애디슨 러셀, 카알 슈와버 같은 타자들을 영입했다. 이들 중 앤소리 리조는 2012년 샌디에이고와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했다. 당시 컵스에 있다가 리조와 팀을 맞바꾼 선수 중 한 명이 한국 투수 나경민이다. 2013년과 2014년 드래프트에서 브라이언트와 슈와버를 뽑았다. 그리고 2014년 트레이드를 통해 러셀을 영입하면서 기본 진용을 완성했다.
이들 핵심선수 4명은 2016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의 1, 3루와 유격수, 그리고 지명타자를 맡았다.
앱스타인은 톰 버두치와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주식 대신 채권을 샀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지속 가능한 성공은 야수(position players)들로부터 나온다”고 강조했다.
팀을 만들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엡스타인 부임 초기엔 오히려 성적이 더 떨어졌다. ‘우승 청부사’로 화려하게 시카고에 입성한 엡스타인이 조바심을 냄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엡스타인은 포스트시즌에서 경쟁할 팀을 만들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인내의 결과 4년째인 2015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시리즈까지 진출한 끝에 이듬해인 2016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차지했다.
2. 원칙을 명확하게 하되 개성을 존중하라
엡스타인이 시카고 컵스에 부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었다. ’컵스 웨이’란 제목을 단 이 매뉴얼은 259쪽 분량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매뉴얼은 시카고 컵스 조직 내 모든 인력들을 열띤 논의를 거친 결과물이다. 톰 버두치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2012년 초 메사호텔에서 나흘 동안 워크숍을 한 뒤 매뉴얼을 만들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매뉴얼 앞부분에 나와 있는 여섯 가지 핵심 원칙이다.
- 우리는 모든 선수 개발을 개인에게 투자하듯이 한다.
- 선수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할 때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래야만 가장 정확하고 철저한 개별선수육성계획을 고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르치는 방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도전한다.
- 개인의 야심보다 조직의 목표를 늘 앞에 둔다.
- 모든 선수들의 문화와 배경을 수용한다. 왜냐하면 이런 경험들을 통해 우리 조직의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사명은 시카고 컵스가 월드시리즈 우승하도록 돕는 것이란 점을 늘 명심한다.
‘컵스 웨이’에도 인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선수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는 감독이나 코치 같은 관리자들도 똑 같은 걸 해야만 한다. 그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원칙만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선수들이 개별 상황에서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는 지도 꼼꼼하게 적혀 있다.
이를테면 선수가 1루로 뛰어갈 땐 ‘왼쪽발로 베이스 앞부분을 밟도록 하라”고 돼 있다. 또 다음 베이스로 가기 위해 베이스를 지나갈 때는 ‘오른쪽 발로 앞부분을 밟아라”고 명기했다.
물론 매뉴얼은 도식적으로 적용되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개별 선수들에게 최적화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이스 밟는 방식은 이후 ‘자기 몸에 맞도록 하라’는 쪽으로 유연하게 수정했다.
정확한 매뉴얼과 선수 개성에 맞춘 유연한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가 핵심 선발 투수인 제이크 아리에타다. 볼티모어 시절 그렇고 그런 투수였던 아리에타는 2015년 사이영상 투수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비결은 뭘까? 컵스는 매뉴얼을 토대로 한 육성 정책 외에 아리에타의 장점을 잘 접목했다. 여기서 잠시 톰 버두치의 설명을 요약해보자.
“투수는 왼손, 오른손 투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두 부류가 있다. 글러브 쪽에 강점이 있는 투수와 손 쪽에 강점이 있는 투수. 이를테면 아리에타 같은 오른손 투수라면 오른손 타자 몸쪽에 강점을 갖고 있는 투수가 손쪽에 강점이 있는 투수다.
컵스가 보기에 아리에타는 글러브 쪽에 강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투구 자세 때문에 원하는 위치로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 그래서 아리에타는 연습 투구할 때 의식적으로 반대쪽, 즉 손 쪽으로 공을 던지도록 했다. 이렇게 연습한 결과 완벽한 제구력을 갖출 수 있었다.”
직전 팀에선 ‘표준적인 자세’를 강조했다면, 시카고 컵스는 ‘기본에 충실하되 아리에타의 특징에 맞춘 육성 방법’을 적용했다.
3. 데이터 만능주의를 경계하라. 더 중요한 건 사람이다
엡스타인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통계에 밝은 신세대 야구인의 대표 주자다. ‘머니볼’ 이후 메이저리그에선 통계와 데이터가 중요한 선수 선발 자료가 됐다.
하지만 엡스타인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보스턴 시절에도 인성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시카고에 온 엡스타인은 인성인 단순히 중요한 수준이 아니었다. 월드시리즈 우승이란 청사진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버두치는 “시카고가 탁월한 점은 숫자로 드러난 데이터 뿐 아니라 영입한 선수들의 인성에 깊은 믿음을 보였다는 점이다”고 평가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엡스타인은 선수 선발의 기준인 스카우트 보고서 양식도 대폭 바꿨다. 선수들의 투구 속도나 파워 대신 주변 사람 인터뷰를 통해 해당 선수에 대한 평가 내용을 적도록 했다.
스카우트하려는 선수가 동료나 상대팀 선수, 그리고 친구나 교사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승리하기 위해 어떤 마음 가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했다.
결국 야구는 ‘감정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운동이란 점을 잘 파악한 셈이다.
4.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데이터가 보지 못하는 사람의 인성까지 검토하면서 선수를 선발했다. 그것도 위험부담이 큰 투수보다는 상대적으로 성공 확률 높은 야수 위주로 팀을 꾸렸다.
그런 다음엔 정교한 육성 시스템을 통해 원칙과 개성을 잘 조화시켰다.
부족한 부분은 외부 영입을 통해 메웠다. 에이스 투수인 존 레스터, 존 랙키 같은 선수들을 FA 영입하면서 팀을 만들었다. 우승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됐을 때는 자유계약(FA)을 앞둔 마무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을 긴급 수혈했다.
5년 만에 완벽한 팀이 구성됐다. 이게 전부일까?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야구가 ‘팀 스포츠’란 점이다. 엡스타인은 ‘연결’과 소통을 강조했다. 팀 버두치 책에는 테오 엡스타인이 구단주인 톰 리케츠에게 한 얘기가 나온다.
“승리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을 향해 가야 한다.”
톰 리케츠는 엡스타인을 영입하기 위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 “숫자보다는 열정과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는 걸 발견했다”고 털어놨다.
톰 버두치는 “엡스타인은 열정과 존경을 갖고 사람들을 대한다”고 평가했다. 이런 팀 운영 철학은 선수단 구성에 그대로 반영됐다.
대표적인 것이 우승을 책임질 감독으로 조 매든을 영입한 부분이다. 조 매든 감독은 탬파베이 시절부터 선수들과 소통을 잘 하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엡스타인이 ‘젊은 왕조’를 책임질 수장으로 매든을 선택한 것도 이런 부분이 잘 반영됐다.
선수 리더 격인 앤소니 리조, 월드시리즈 우승과 함께 은퇴한 노장 포수 데이비드 로스 같은 선수들도 팀을 하나로 엮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연결’과 소통을 강조한 팀 운영 방식은 마지막 게임에서 빛을 발했다.
이 부분도 팀 버두치의 책에서 그대로 요약해보자.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시카고 컵스는 다 이긴 경기를 막판에 망칠 뻔했다. 3점 리드 상황에서 올라온 마무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이 8회말 석 점을 빼앗기면서 동점이 됐다.
경기는 9회가 끝난 뒤 갑자기 내린 비로 17분 동안 중단됐다. 이 때 시카고 팀은 체력단련실에서 선수들만의 긴급 미팅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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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자리에 채프먼이 없었다. 혼자서 덕아웃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 선수들은 그를 불러온 뒤 “네가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런 다음 ‘채프먼을 위해서도’ 승리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그 다음 얘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시카고 컵스 팀은 속개된 경기 연장 10회초에 2점을 얻으면서 108년 간 이어진 ‘염소의 저주’를 멋지게 끊어냈다. 인성과 소통을 강조했던 테오 엡스타인의 리더십에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