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 자동차 전장(電場) 부품 전문기업인 하만(Harman)을 80억달러(약 9조3천800억원)에 인수한다. 국내 기업의 해외기업 M&A(인수합병) 사상 최대 규모다. 단순히 M&A 금액보다는 차세대 스마트카의 종착역인 '커넥티드 카' 시장에 미칠 파장이 더 주목된다.
이번 인수를 통해 삼성전자는 자사의 TV, 스마트폰은 물론 VR, 웨어러블 등 고유의 강점에 하만의 기술과 브랜드를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전장사업에 날개를 달게 됐다. 지난해 말 전장사업부를 꾸리긴 했지만 안전성이 중요한 자동차 부품의 특성상 판로 개척에 애로를 겪으며 가시적인 수주 실적을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단숨에 수많은 완성차업체들과의 거래선을 확보하게 된 셈이다.
전장부품 시장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자동차 제조원가에서 전장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30%에서 오는 2030년 50%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하만은 커넥티드카용 인포테인먼트, 텔레매틱스, 보안, OTA(무선통신을 이용한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솔루션 등의 전장사업 분야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연간(직전 12개월 기준) 매출은 70억달러, 영업이익은 7억달러에 달한다. 매출 가운데 전장사업이 6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커넥티드카와 카오디오 사업은 연매출의 약 6배에 달하는 240억달러 규모의 수주 잔고를 보유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은 프리미엄 인포테인먼트 24%(1위), 인포테인먼트 10%(2위), 텔레매틱스 10%(2위)다. 토요타, 폭스바겐 뿐 아니라 벤츠, BMW, 아우디 등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를 비롯해 롤스로이스, 포르쉐,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최고급 브랜드들이 하만의 제품을 탑재하고 있다. 현재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헝가리, 독일, 중국, 인도 등 세계 10개국에 19개 제조 거점을 갖고 있으며 이 중 전장사업은 9개다.
특히 하만은 JBL, 하만카돈, 마크레빈슨, AKG, 렉시콘 등 프리미엄 오디오 브랜드도 보유하고 있다. 뱅앤올룹슨과 바우어앤윌킨스 등도 인수했다. 현재 카오디오 시장에서 하만의 시장점유율은 41%로 독보적인 1위다. 독일 명차인 메르세데스-벤츠와 BMW는 물론, 슈퍼카 페라리와 포르쉐 등에도 하만 오디오가 탑재된다. 국내에는 현대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최상위 차종인 EQ900에 렉시콘 사운드 시스템이 들어간다.
전장부품과 관련해서는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했던 삼성전자가 하만 인수를 통해 단번에 수많은 거래망과 고객사를 거느린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사실상 업계에서는 보쉬, 델파이 등 '티어1(Tier1)'급에 버금가는 시장 입지를 구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학 자동차학과 교수는 "삼성전자가 지닌 5세대(5G) 통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하드웨어 부문에서의 경쟁력과 하만의 인포테인먼트, 텔레매틱스 솔루션, 보안, OTA 솔루션이 결합되면 글로벌 선두 전장업체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삼성전자 내부적으로 전장사업부 자체 내에서의 해결 의지 만으로는 빠르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하만 인수에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커넥티드 카 개발의 핵심이 되는 소프트웨어(SW)의 신속한 역량 강화를 위해 M&A 확대에 속도를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삼성전자의 전장사업은 IVI(In-Vehicle Infotainment·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와 자율주행차 부품 시장에서의 경쟁 우위 확보를 통해 결국은 커넥티드 카 개발이라는 방향으로 궤를 그리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커넥티드 카는 자동차와 정보통신(IT)기술을 연결시켜 양방향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 등이 가능한 차량을 일컫는다. 자동차와 주변의 사물이 쌍방향 네트워크로 연결돼 운전의 안전과 편의성이 높아진다. 자율주행차보다 한층 진일보한 개념의 차다. 커넥티드 카가 현실화될 경우 자율주행은 기본이 된다. 삼성전자와 하만의 결합은 궁극적으로 커넥티드 카를 정조준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인수로 양사가 자체 보유한 기술을 융합한 커넥티드 카 시스템의 개발은 필연적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하만 인수라는 과감한 승부수를 통해 커넥티드 카 개발 부문에서 경쟁업체들과의 격차를 단숨에 좁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그저 수많은 협력사 중 하나로 치부했던 완성차업체들의 태도 역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더 나아가서는 기존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이종(異種) 업체간 협업 구도에서 배제됐던 삼성전자가 판을 뒤흔들 '1순위' 파트너로 부각될 가능성도 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이동수단이 아닌 ‘엔진을 단 전자기기’의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완성차업체와 IT(정보통신)업체 간 기술 선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겠지만, 상호 배타적인 구도보다는 보다 매력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는 업체와의 공동 개발을 통한 협업이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국내 완성차업계의 수장인 현대자동차 역시 오는 2020년께 '초연결 지능형 자동차(Hyper-connected & Intelligent Car)' 콘셉트의 신모델 출시를 목표로 커넥티드 카 개발에 전사적인 역량을 투여하고 있다. 사내 차량지능화사업부를 통해 'ccOS(Connected Car Operating system)'로 이름 붙여진 커넥티드 카 운영 체제의 독자 개발을 진행 중이며, 올 4월에는 글로벌 네트워크 장비 및 솔루션 기업인 시스코와 손을 잡고 커넥티드 카의 핵심 플랫폼 기술 중 하나인 차량 네트워크 기술도 개발 중이다.
협업도 적극 추진한다. 커넥티드 카 관련 기술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은 물론 국내 스타트업과의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도 적극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커넥티드 카를 이끌 빅데이터 센터를 국내에 이어 중국에 구축키로 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전장업계에서 위상이 현격히 높아진 삼성전자와 현대차간 커넥티드카 협업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측도 나온다. 일단 삼성이 완성차 사업으로의 진출 가능성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 점도 이같은 전망에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실제 노조와 품질관리 비용도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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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완성차시장에 진출했던 잠재적 경쟁사가 될 수도 있는 삼성을 굳이 파트너로 선택하기 꺼려졌던 현대차의 부담은 다소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역시 미래차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불사할 것이라는 협업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다.
김필수 교수는 "양사가 커넥티드 카 부분에서 전략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최상의 시나리오"라면서 "정부가 정책적 지원을 하는데도 제약이 적고 고용창출, 기술력 향상 등 100% 시너지 창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