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의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는 운영체제인 OS1의 ‘사만다’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고, 고민을 나누다, 결국 사랑까지 빠져든다.
그런데 테오도르에게 이성 친구처럼 고민을 털어놓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사만다는 그만의 연인이 아니었다.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8316명 대화 상대 중 한 명의 ‘고객’에 불과했다.
영화는 우리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배경이지만, 관객들은 사만다와 같은 가상의 친구를 맞이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에 빠진다. 나아가 무르익던 두 관계가 테오도르 짝사랑으로 확인된 순간, 주인공에 몰입된 나머지 사만다에 서운함과 배신감까지 든다. 인공지능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약’일지 ‘독’일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처럼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가운데, 이미 우리 실생활에는 사만다를 목표로 한 다양한 음성인식 기반의 인공지능 서비스가 속속 출시되고 있다.
사만다가 음성인식 기반 인공지능 서비스의 최종 버전이라면 아마존 ‘에코’, 구글 ‘구글 홈’, SK텔레콤 ‘누구’는 알파 또는 베타 버전 수준이다. 애플과 구글의 음성인식 검색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구글은 또 최근 음성인식 기반 인공지능 모바일 메신저 ‘알로’를 정식 출시하기도 했다.
이 중 SK텔레콤 ‘누구’는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우리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인공지능 서비스”라고 평했다. 이미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이 유사한 서비스를 내놨지만, ‘누구’만큼 한국어를 가장 잘 소화하는 서비스는 아직 없다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이 ‘쌀’을 ‘살’로 발음해도 알아들을 만큼 자연어 인식과 처리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는 설명이다.
현재 ‘누구’는 원하는 음악을 추천하고 재생해주는 스피커의 역할, 날씨 안내와 가전기기 제어 등 제한된 기능만 갖고 있다. 앞으로는 음식 배달, 쇼핑, 독서, 교육 등 여러 분야와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당장 다음 달부터 말로 피자 배달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누구'는 ‘리틀 사만다’ 정도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수준까지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물론 ‘누구’ 사용자가 꾸준히 증가해 축적되는 데이터양이 현격이 많아져야 최종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수집된 데이터가 방대해야 복잡한 언어체계를 이해하고, 사람마다 다른 발음과 억양까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클라우드 서버를 이용해 사용자와 ‘누구’의 대화를 수집하면서, 이를 빅데이터화 시킨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 핵심 기술인 딥러닝을 통해 데이터가 쌓일수록 ‘누구’ 스스로 진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영화처럼 사용자가 ‘누구’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진화할까. 반대로, 사람들의 눈길만 반짝 끌고 사라지는 ‘신기한 서비스’ 정도에 그치지는 것은 아닐까. 시장의 눈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이 같은 물음에 지난 21일 열린 SK텔레콤이 마련한 ‘누구나 주식회사’ 가상회사 창립 행사에서 전문가들은 “아직”이라면서도, “언젠가는”이란 가능성과 희망에 무게를 뒀다. ‘누구’가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머지않아 사용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란 설명이었다.
프로그래머이자 누구나 주식회사의 이두희 대표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쌓는 것이 누구나 주식회사의 역할이다. 몇 년 안에 영화처럼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나올 것 같다”고 예상했다. 어느 정도 기대치가 담긴 희망사항과 같은 답변이면서도, 가능성이 아주 없지 않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정재승 교수는 “‘누구’는 아직 음악을 틀어주고 날씨를 알려줄 뿐 어떤 캐릭터가 들어가 있지는 않다. 나름의 캐릭터가 있고 얘가 나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점점 나를 이해하고 나에게 맞는 캐릭터로 성장하면서 사용자가 요구하면 반응만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질문하는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성장할 ‘누구’의 개발 방향을 제시하고, 기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또 그는 인공지능이 계속 진화해 자신을 스스로 인지하고 사고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원숭이 앞에 타자기를 두고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이 나오는 정도”로 가능성을 매우 낮게 봤다. 혹시나 '누구'와 같은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한 답이었다.
서울대학교 장병탁 컴퓨터공학 교수는 “‘누구’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은 서먹하고 대화도 못 알아들을 수 있지만 기계학습해 나가면서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음성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도 있지만 인지 과학적으로 보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쉬울 수도 있다. 기계학습을 통해 훨씬 더 발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음성을 통해 정보를 축적하는 '누구'의 발전 속도가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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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가 ‘남심’을 사로잡는 사만다 수준까지 발전할지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아직 물음표다. 사실 긍정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럼에도 온전히 자신의 몸을 갖춘 인공지능 서비스 ‘누구’가 지금의 걸음마 단계에서, 앞으로 어떻게 또 얼마큼 빠른 속도로 달릴지 기대가 모아진다. 업계는 구글, 아마존, IBM, 소프트뱅크 등이 주도하는 인공지능 시장에 SK텔레콤이 유의미한 가능성을 보여줄지가 관심사다. 이 가운데 누구나 주식회사에 가상 취업한 과학 전문가들은 ‘누구’를 나를 잘 아는 친구이자, 똑똑한 비서로 키워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