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래창조과학부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을 비식별 전문기관으로 선정했다. 비식별 개인정보를 다른 데이터와 결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 위한 조치였다.
비식별 개인정보는 이름, 나이, 직장, 주소 등을 제외한 정보를 의미한다. 이 정보를 활용할 경우 특정 연령대의 소비 행태나 금융상품 이용 행태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로써 4차산업혁명의 핵심 영역인 빅데이터 분야를 옥죄던 중요한 규제 하나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4차산업혁명이 중심 화두로 자리 잡으면서 시대에 걸맞지 않은 각종 규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물론 정부도 규제해소에 관심을 갖고 있다. 비식별 개인정보 사례처럼 조금씩 해결된 규제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지디넷코리아는 ‘4차산업혁명, 규제 개혁부터’ 시리즈를 통해 총 8회에 걸쳐 규제개혁 과제를 점검했다. 예상대로 해결 과제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별적인 규제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왜, 그리고 어떤 관점으로 규제 이슈를 바라 보느냐 하는 점이다. ‘4차산업혁명, 규제 개혁부터’ 시리즈를 끝내면서 굳이 에필로그를 덧붙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규제 개혁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까? 역사 속 사건에서 논의의 출발점을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4차산업혁명과 관련해 많은 전문가들이 거론한 적 있는 영국의 ‘적기 조례’부터 출발해보자.
■ 적기조례의 교훈…기존 패러다임 벗어나야 새 길 열린다
19세기 중반 증기자동가 나오자 마자 영국 정부는 중량과 속도를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시가지를 운행할 때 시속 2마일(약 3.2킬로미터)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더 황당한 조치는 바로 기수였다. 빨간 기를 든 기수가 증기자동차 앞에서 달리면서 주변에 자동차가 오고 있단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이 규제 조치가 세계 최초 교통법인 기관차량조례(Locomotive Act) 였다. 이 조치는 빨간 기를 든 기수 때문에 ‘적기조례(Red Flag Act)’로 널리 불려졌다.
적기조례의 명분은 그럴듯했다. 보행자나 마차들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시 대중교통의 중심이던 마차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마차산업 종사자를 기수로 흡수하겠다는 ‘배려’도 함께 깔려 있었다.
적기조례의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영국 자동차산업이 각종 규제에 묶여 주춤하는 사이 독일, 미국 등 경쟁국들이 빠른 속도로 앞서나갔다. 결국 영국은 자동차 경쟁에서 독일, 미국 등에 밀렸다. 가장 먼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도 오히려 자동차 분야 2류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적기조례’는 지금 관점으로 바라보면 황당하기 그지 없다. 성장 산업의 발을 억지로 묶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적기조례’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 현재 번성하고 있는 산업의 기득권 논리에 빠져 미래 성장산업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금융 혁신의 기초가 될 인터넷은행을 가로막고 있는 ‘금산분리’ 규제가 대표적이다. 전통산업 관점에선 충분히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금융과 ICT가 융합되는 새로운 시대엔 ‘적기 조례’와 비슷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드론이나 자율주행차 같은 분야도 마찬가지다. 역시 전통 비행이나 자동차 산업에 초점을 맞춘 각종 규제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자율주행 시험장부터 임시운행 허가까지 엄격한 규제 때문에 실험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 규제 철폐 못지 않게 규제 인프라도 중요하다
4차산업혁명 화두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전문가들이 규제 이슈를 거론해 왔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은 지난 6월 경제전문지 이투데이에 기고한 칼럼에서 “4차산업혁명에 걸맞은 규제 패러다임 혁신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특히 한국이 드론, 자율차,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원격의료, 인공지능 등 거의 모든 4차 혁명의 핵심 산업에서 중국에 뒤진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규제의 결과라고 단언했다.
그런 관점에서 이 회장은 ▲규제 인프라 ▲네거티브 규제 ▲규제 프리존 개선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역시 비슷한 해법을 내놨다. 대한상의는 올초 사물인터넷을 비롯한 대표적인 신성장산업을 옥죄는 ‘규제 트라이앵글’을 해소해 달라고 촉구했다. 당시 대한상의가 문제 삼은 ‘규제 트라이앵글’은 ▲사전 규제 ▲규제 인프라 부재 ▲포지티브 규제였다.
승인 받아야만 사업에 착수할 수 있도록 돼 있는 사전 규제는 신성장 산업을 하지 말란 얘기나 다름 없다. 정해준 영역만 할 수 있는 포지티브 규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업 영역 개척이 필요한 시대엔 걸맞지 않은 걸림돌이다.
이 회장이나 대한상의가 모두 문제로 삼은 규제 인프라 부재 문제도 심각하다. 융복합 신제품을 개발해도 안정성 인증 기준이 없어 제 때 제품을 내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3D 프린터로 인공장기나 인공피부를 제작하더라도 국내 시장에서 판매하기가 쉽지 않다. 안정성 인증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보험사의 건강관리 서비스 역시 관련 규정이 없어 그냥 방치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을 제대로 수용할 규제 인프라 부재는 혁신 저하로 이어진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알렉 로스의 ‘미래산업보고서’를 통해 그 부분을 살펴보자. 로스는 이 책에서 핀테크 사례를 통해 규제와 혁신문화가 어떤 차이를 낳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뉴욕과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꼽힌다. 하지만 금융과 ICT의 융합인 핀테크 쪽으로 눈을 돌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장 많은 투자가 몰린 곳은 놀랍게도 실리콘밸리다. 실리콘밸리는 전체 투자의 약 3분의 1을 독점하면서 뉴욕과 런던을 2, 3위로 몰아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로스는 세계적 핀테크 기업인 스탠더드트레저리 창업자인 잭 타운센드가 창업 당시 런던이나 뉴욕 대신 캘리포니아 주를 주목한 것을 통해 이 사실을 설명했다.
타운센드에게 중요한 것은 은행업 중심지란 점보다 혁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였다. 혁신을 장려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가 금융도시 뉴욕과 런던의 전문성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핀테크 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 신기술엔 따뜻한 애정을…'규제 조급증’ 버려야
그렇다고 규제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산업의 질서를 유지하고 건전한 경기 규칙을 만들기 위한 ‘필요악’이다.
’금산분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조항은 산업자본이 금융산업까지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다. 따라서 금산분리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순 없다.
하지만 금산분리는 인터넷은행이란 신기술이 성장하는 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인터넷은행은 금융과 ICT의 융합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ICT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금산분리를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인터넷은행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건 자율주행차의 앞길을 막고 있는 각종 안전 규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산업은 그 어떤 분야보다 안전이 중요하다. 소중한 생명을 지킬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선 규제 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무조건 이런 규제를 혁파하자고 하는 건 무모할 수도 있다. 신기술, 신산업은 무조건 육성하고 특혜를 주는 것도 분명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왜 규제를 고집하는지에 대한 냉정한 반성과 성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신기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광운대 김주찬 교수는 ‘행정포커스’에 기고한 ‘4차산업혁명 시대의 규제 개혁 과제’에서 테슬라 자율차 사고 사례를 통해 이 부분을 잘 지적했다.
지난 5월 테슬라 자율주행차가 트레일러와 충돌하면서 운전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테슬라 모델S의 센서가 옆면에 하얀색이 칠해진 트레일러가 좌회전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당연히 자율차 규제 얘기가 나올 수 있음직한 사안이었다. 실제로 당시 국내 언론들은 자율차 규제를 촉진하는 법률을 제정할 것이란 전망 기사를 게재했다.
하지만 미국 언론의 접근방식은 달랐다. 김주찬 교수에 따르면 미국 언론들은 당시 사망 사고에 대해 자율주행차 시대 초기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부작용이란 관점으로 접근했다. 오히려 사고를 계기로 쓸데 없는 규제를 가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그 사건을 계기로 자율주행차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부분을 보완하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테슬라 사고를 대하는 미국 언론과 정부의 자세는 4차산업혁명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신기술이 사회 속에 자리잡는 과정에선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원격의료를 예로 들어보자. 원격의료 서비스를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 ‘사람’ 의사가 의료사고를 낼 가능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격의료 역시 그럴 위험은 늘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원격의료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신기술이 개입됐기 때문이라면서 집중 포화를 가하지 않을까? 원격의료를 금지하는 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들끓지 않을까? 똑 같은 사고를 사람이 냈을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집중 성토할 가능성이 많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리고 당연히 안전문제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관점까지 흐려버려선 안된다. 이 때 중요한 건 ‘잘못된 기술 때문에 일어난 재앙’인지 ‘보완해야 할 기술의 한계’인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사회 전체가 신기술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보고 수용하는 관점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이와 함께 정부는 ‘규제 조급증’을 버리고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 밑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이다.
■ 중요한 건 수요자 중심…민관소통이 출발점이다
지디넷코리아는 ‘4차산업혁명’을 올해 최대 이슈로 선정했다. 그 첫 출발이 지난 7월 게재한 ’4차산업혁명’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창조적 뉴딜을 통해 한국형 4차산업혁명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한국형 4차산업혁명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란 특별 기획대담을 마련했다. 송희경 새누리당 의원, 현대원 대통령비서실 미래수석, 최재유 미래부 차관 등 정관계 핵심 관계자들이 참여한 대담이었다.
대담 참석자들은 산업화시대의 마지막 유물을 깨기 위해선 다양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이를 위해선 4차산업혁명 흐름에 걸맞지 않은 규제를 풀고 기업들이 맘껏 춤출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됐다.
물론 4차산업혁명은 글로벌 이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글로벌 이슈를 우리 몸에 맞게 잘 다듬는 일이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 실행 파일로 넘어가면서 가장 먼저 규제개혁 문제에 관심을 가진 건 그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이 ‘4차산업혁명, 규제 개혁부터’ 시리즈였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는 제재 보다는 장려 쪽에 초점을 맞춘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국 적기조례 같은 시대착오적인 규제를 탈피하기 위해서도 따뜻한 관점으로 신기술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지만 그에 앞서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 규제 개혁 작업은 공급자 중심으로 이뤄져선 안 된다는 점이다. 수요자의 필요를 잘 파악하고 그들이 가려워하는 것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선의에서 출발한 각종 장려 정책이나 규제가 ‘탁상행정’이란 비판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에 걸친 연구작업 끝에 야심찬 정책을 마련한 정부 입장에선 서운할 수밖에 없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수요자의 욕구나 목소리 보다는 공급자의 의욕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부는 각종 정책을 마련할 때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다. 실제로 법제처는 지난 6월 행정규제기본법 일부 개정법률 입법 예고를 하면서 의견을 보내달라는 공지를 했다. 전화번호나 팩스, 전자우편까지 친절하게 올려놨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게 있다. 핵심 정책 담당자와 업계 최고 결정권자들이 직접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특히 4차산업혁명 시대엔 소통이 중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이 잘 지적했다. 슈밥은 최근 출간된 '4차산업혁명의 충격'에 기고한 글에서 "4차산업혁명은 빠른 진행 속도와 광범위한 영향력 때문에 입법자와 규제 담당자들이 전례 없는 강도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기민한 관리 방법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슈밥은 제언했다. 규제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철저히 개혁해서 새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슈밥은 이를 위해 "정부와 규제 담당 부서는 기업 및 시민사회와 밀접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과 규제 개혁을 중요한 화두로 던지면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그래서 지디넷코리아는 앞으로 정관계와 업계 대표들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되려고 한다. 그게 대한민국 대표 IT 미디어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차산업혁명, 규제 개혁부터'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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