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통합(SI) 프로젝트에서 첨단과 성장 잠재력의 냄새를 찾기 힘든 것이 요즘 현실이다.
몇백억원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라고 해서 다를건 없다. 크던 작던 SI 프로젝트는 한국 IT생태계에서 막장과 삽질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예정대로 끝나는 경우가 드문건 둘째치고 이길인줄 알았는데 와봤더니 저길이어서, 돌고 돌아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식의 프로젝트가 많은 탓이다.
김익환 에이비시테크 대표는 최근 출간한 '글로벌 SW를 말하다-지혜'에서 이같은 상황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한국SW의 미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교한 사전 분석이 없는 SW개발은 결국 노가다라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그러면서, 한국형 SI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사례로 키움증권이 추진한 차세대 원장 시스템 프로젝트를 꼽았다. 그의 눈에 비친 키움증권 프로젝트는 한국 IT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을 상징적인 사건이다. 참고하고 또 참고할만한 프로젝트다.
2년의 시간이 투입된 키움증권 프로젝트는 지난해 9월 완료됐다. 관계사인 다우기술이 맡아서 진행했는데, 예정보다 2주 정도 빨리 끝났다. 예정보다 빨리 끝나는건 한국IT 프로젝트 역사에서 흔치 않은 사례다. IT프로젝트는 예정보다 늦게 끝나야 한국에선 정상이다. 미루고 또 미루다가 예정보다 1년 후에나 끝나는 프로젝트도 있다.
키움증권이 일정에 맞춰 프로젝트를 마무리한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접 얘기를 들어보니, 키움증권 사례가 기존 SI 프로젝트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우선순위였다.
키움증권 프로젝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소프트웨어 요구사항 명세서(Software Requirement Specification: SRS)를 쓰는, 다시 말해 개념 정의에 할당한 시간이 가장 길었다는 점이다. SRS는 말그대로 하려는 프로제트의 스펙을 정의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에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는 요구사항을 아주 아주 정교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키움증권은 이 부분에 개발이나 구현보다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스펙을 제대로 적는건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맞는 말이지만 현실은 180도 다르다. 다수 IT프로젝트가 요구분석보다, 코딩과 구현에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일단 시작하고보자식의 관행이 부른 결과물이다. 코딩하면서 분석이나 설계를 그때그때 고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프로젝트가 끝나고 정리한 문서가 시작할때와는 딴판인 경우도 수두룩하다.
반면 키움증권 프로젝트는 분석에만 10개월이 투입됐다. 설계, 개발, 구현에 들어간 시간은 모두 합쳐 14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 다른 IT프로젝트에서도 순서를 바꿔 분석에 신경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분석 역량이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은 아니다. 키움증권과 다우기술도 분석을 중심으로하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이슈관리시스템 등에 적응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 프로젝트 기간까지 합치면 환골탈태에는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들어간 셈이다.
경험담을 들어보니, SW요구사항 분석이라는게 하고 싶다고 바로 하겠다고 나서면 대단이 위험한 일이다. 역량없이 뛰어드느니 차라리 예전해 하던대로 하는것이 낫다는 얘기도 들린다. 중요한 만큼이나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분석 역량이라는 얘기다.
제대로된 분석을 위해서는 프로젝트 주체인 발주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프로젝트에 무엇이 필요한지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외주 업체에 알아서 해달라고 하는순간, 프로젝트는 산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키움증권 차세대 프로젝트를 이끈 다우기술의 신상범 전무는 처음부터 발주사가 SRS를 잘 만들도록 하자는데 초점을 뒀다면서 함께 작업을 했지만 SRS작성의 주체는 발주사였다고 말했다.
관행이라는게 한번 굳어지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머리로는 바꾸는게 맞다는걸 알겠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SRS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현장에선 아마도 머리와 몸들이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키움증권과 다우기술이 사전 분석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된 계기를 물었다. 예전에 하던 방식에 대한 진지한 문제 의식이 출발점이었다. 경영진의 적극적인 지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상범 전무는 벤치마킹을 해보면 다들 대략적으로만 얘기하고, 어떤 내용은 처음부터 빠졌거나 구현하면서 바꾸는 것도 많고, 문서 자체도 충실하지 않았다면서 체질개선을 위해 근본적인 변화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다우기술은 키움증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과 적극 협력했다. 특정 업체와 통째로 계약을 맺는 방식을 벗어나, 분야별로 전문성을 갖고 있는 프리랜서 개발자들을 끌어들였다. 보수를 많이 주는 대신 인터뷰를 꽤 많이 봤다고 한다. 기술이 좋은 사람을 제대로 뽑기 위해서였다. 다우기술은 적극적인 정보 공유를 통해 내부 멤버들과 외부 프리랜서 개발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벽도 허물었다.
진지한 문제 의식, 경영진의 지원, 프로세스 개선을 위한 충분한 시간 확보, 외주 개발자들과의 협업 문화, 내재화 역량 강화. 키움증권과 다우기술이 분석에 초점을 맞춰 차세대 프로젝트를 예정에 맞춰 오픈할 수 있었던 요인들은 대충 이렇게 요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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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프로젝트는 발주에서 시작된다. 발주자가 제 역할을 해야, 주먹구구식 IT프로젝트라는 고질적인 관행을 깰 수 있다는 얘기다. 키움증권 사례를 보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정말로 와 닿는다. 제대로된 발주는 프로젝트를 제날짜보다 빨리 끝낸 것은 물론 오류도 많지 않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SW생태계 혁신을 위해서는 발주자의 전문성 강화가 필수라는 얘기가 나온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키움증권 사례는 발주 개혁이 왜 화두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