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 홍진호가 나왔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도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하지만 공중파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아니기 때문에 가슴에 큼직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름 위엔 직업도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홍진호의 직업은 물론 프로게이머다. 하지만 스태프의 실수로 그의 직업은 프로그래머라고 적혀 있었다. 장난기 넘치는 MC들이 그런 실수를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잘못 적힌 직업을 놓고 우스갯소리가 이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참 농담을 하던 유재석은 스태프를 바라보며 “그런데 프로그래머라는 직업도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프로그래머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평생 프로그래머로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MC가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을 지칭하는 말을 모르고 있다니. 한국에서는 주로 개발자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일 거라며 위안을 삼았지만 섭섭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프로그래머라는 말을 모르는 것이 유재석의 잘못은 아니다. 대학 입시철에 컴퓨터공학이나 소프트웨어 관련 학과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닌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 프로그래밍이라는 일은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기피대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한국에 있는 컴퓨터 관련 대학교수들은 SCI 저널을 중심으로 하는 실적평가 시스템 때문에 진정한 연구를 수행하지 못하고 실적 채우기 위주의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며 하소연을 한다. 그래서 국내에서 최고의 실적을 인정받은 학자가 국제적인 학술대회에 나가면 찬밥신세인 경우가 많단다. 현장에서 프로그래밍을 수행하는 개발자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공급해야 하는 대학이나 연구소의 현실조차 이렇게 척박하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의 현실은 달리 언급할 필요도 없다. 박봉과 야근에 시달리는 프로그래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긍심과 기쁨을 맛보기는커녕 고달픈 3D 중노동 때문에 가정이 깨지거나 건강을 잃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다.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업계는 갈라파고스다. 재능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익을 좇는 자본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우는 해외 각국의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섬이다. 어느 나라보다 세계화를 애타게 부르짖는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업계 현실이 이렇게 다른 선진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채 자폐적인 진화를 (혹은 퇴화를) 경험하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러하니 유재석이 프로그래머를 몰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유재석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렇게 분위기가 칙칙하고,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프로그래머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지금이 이름 모를 프로그래머가 묵묵히 밤을 지새우며 수행한 노동의 결과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시대라는 사실은 기억하기 바란다.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가진 누군가가 키보드를 한 땀 한 땀 두드려서 만든 코드가 없으면 정상적인 삶이 지탱되지 않는다.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대가 새로 뽑은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켜는 순간, 수십 개의 작은 컴퓨터가 엔진과 함께 동작을 시작한다. 컴퓨터들은 각자의 소프트웨어를 돌려서 산소를 측정하고, 공기압을 확인하고, 바깥 온도를 재고, 엔진내부의 상태를 점검한다. 이 때 차 내부에서 동작하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파워는 닐 암스트롱이 타고 달까지 갔다는 아폴로 우주선 안에 담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파워를 능가한다.
차가 신호등의 빨간불에 걸려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대는 어디에선가 돌아가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허락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교통량이 많거나 중요한 관공서가 위치한 곳이라면 유전(genetic) 알고리즘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를 구현한 신호등이 사용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수시로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이 그 자체로 하나의 컴퓨터이며 그 안에서 운영체제와 웹브라우저 같은 소프트웨어가 동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므로 이야기하지 말자. 하지만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용카드로 값을 지불하려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은 기억하자.
스캐너가 카드번호를 읽어서 음식점에 있는 컴퓨터에게 전달하고, 컴퓨터는 그것을 어딘가에 있는 서버에 전달해서 확인을 한다. 그리하여 그대가 밥값 만원을 결재하기 위해서 카드를 사용해도 좋은지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사도,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도 다 마찬가지다.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인터넷 서점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맞춤한 추천도서를 골라내기 위한 알고리즘이 CPU를 뜨겁게 달구며 동작을 개시하고, 월급명세서를 확인하기 위해서 ATM이나 온라인뱅킹으로 잔액을 확인할 때도 누군가 밤을 지새우며 만들어놓은 소프트웨어의 도움을 받는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 중에서 어느 것은 소프트웨어가 스스로 ‘창조’한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고, 눈을 즐겁게 해주는 영화의 많은 부분은 확실히 소프트웨어가 ‘창조’한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소프트웨어가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깊어져만 간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저절로 생기거나 기계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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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새벽 2시까지 키보드를 한 자씩 두드려서 만든 노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사람들이 옷을 만들기 위해서 직접 손으로 바느질을 했던 것처럼, 21세기 사람들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서 직접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야만 한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현대사회의 근간을 지탱해 주는 소프트웨어는 없다.
그러니까 프로그래머란 이런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손끝에서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국민 MC 유재석이 지디넷코리아 칼럼을 읽지는 않겠지만, 그를 포함해서 모든 국민이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의 존재를 알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그 일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더 나아가 프로그래머 사이에서 신망을 얻은 프로그래머가 해피투게더와 같은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초청을 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가슴에 커다란 이름표를 달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게스트로서 말이다. 스티브 워즈니악이나 마크 저커버그처럼.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