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국가의 비밀

전문가 칼럼입력 :2013/12/26 10:02    수정: 2013/12/26 11:20

임백준
임백준

댄 세노르와 사울 싱어가 쓴 'START-UP Nation'이라는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말로 '창업국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있으므로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스라엘의 중소기업들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미국 IT 산업의 엔진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PC라면 이스라엘의 벤처기업들은 CPU에 해당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물론 최첨단 하드웨어 산업도 이스라엘에서 발생하는 혁신과 아이디어가 업계의 흐름을 주도한다. 세노르와 싱어는 인구가 천만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그러한 힘을 갖게 된 배경과 이유를 분석한다.

그들이 발견한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의 군사문화다. 최고 수준의 대학보다 더 집중적으로 인텔리를 양성하는 이스라엘의 군사문화는 다른 나라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시스템이다. 책의 설명을 따라 가다보면 그러한 시스템이 뛰어난 인재를 배출한다는 주장이 수긍이 간다.

실제로 대학 못지않은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사회에서 쌓기 어려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경험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20여 년 전에 육군에서 일반사병으로 3년간 복무를 하고 일반하사로 제대를 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보건대 요즘 군대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들이 감당하는 군대복무기간은 무자비한 ‘지우개’에 해당한다. 몸과 마음으로부터 지식과 젊음과 열정을 싹싹 지우고 제대하는 것이다. 세노르와 사울이 보면 놀라서 까무라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의 군사문화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혁신과 개혁의 자양분이 군사문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역사와 현실에 따라서 군사문화는 대학문화가 될 수도 있고, 기업문화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문화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고려해보면 군사문화라는 단어가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함의하지는 않는다. 이 책을 언급한 이유는 ‘후츠파(chutzpah)’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하면 ‘당돌함’ 혹은 ‘뻔뻔스러움’ 정도가 될 후츠파는 이스라엘의 문화를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키워드다.

세노르와 사울은 이스라엘의 군사문화가 개개인들에게 ‘후츠파’라는 철학을 심어준다고 주장했다. 후츠파는 스스로 생각하고, 어떤 상황이 자기가 내린 판단과 부합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논쟁하고, 스스로의 믿음에 따라서 행동하는 철학이다.

장군이 내린 명령이라고 해도 현장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으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무조건적인 복종과 개성의 말살을 강요하는 우리나라의 군대와 정반대다.

우리나라 사람이 후츠파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상상으로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군대에서 일반사병이 장군에게 다가가서 마음대로 잘못을 지적하고, 기업의 일반사원이 사장에게 가서 마음대로 자기 생각을 밝히는 상황은 개그콘서트와 같은 상황극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 자체가 너무나 부조리하게 느껴지기에 헛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일상의 모습이란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해보았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미국의 직장은 한국에 비하면 훨씬 자유분방하고 격식이 없지만, 그런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조차 이스라엘에 가면 문화충격을 받고 놀란다고 한다.

예컨대 전체 직원이 모여서 행사를 가질 때 서로 대화하는 모습만 보아서는 CEO와 일반직원을 구별할 수 없고, 심지어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사 사람 5명이 회의실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나기로 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커피머신이 있는 문 쪽에 5명 중에서 제일 높은 부장이 앉아 있다고 하자. 이제 회의에 참석하는 클라이언트가 방 안에 들어와서 그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나라라면 5명 중에서 가장 직급이 낮은 막내가 얼른 일어나서 커피를 서빙 할 것이고 부장은 그런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부장이 커피머신에서 가장 가깝게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커피를 뽑아서 서빙을 하고 나머지 4명은 그런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본다.

이 점은 미국도 어느 정도 그렇다. 회의실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자리에 앉았다고 하자. 안쪽에 앉은 과장급 사람이 문을 닫고 시작할까, 하고 말하면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부장, 혹은 그 이상의 직급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문을 닫는다.

인터넷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청소부와 손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진과, 한국의 어떤 국회의원 앞에서 청소부 아줌마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사진을 나란히 놓고 대비한 것을 보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러한 후츠파 철학의 핵심이 격식과 전통을 파괴하고 무질서를 도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당돌함은 무례함이 아니다. 이러한 철학의 핵심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일체의 억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상상을 자양분으로 삼고 자라는 나무라는 인식에 있다.

한 사회가 이러한 철학에 몸과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스스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기득권층에서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혁신과 당돌함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에게 이익을 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억압하거나 권위주의에 기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아래에서 자유분방하게 혁신하는 비기득권층은 이미 기득권으로 상승한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올라갔음을 알기 때문에 신뢰와 존경을 보낸다. 후츠파 철학은 겉보기와 달리 비판하고 혁신하는 대상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후츠파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상식이 실종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은 암울하다. 정치는 본래 논쟁과 싸움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논쟁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벗어나지 않는 틀에서 진행되어야 하고, 싸움은 사회적 계층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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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상식을 파괴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선동이고, 딱지붙이기고, 세뇌이고, 선전이고, 억압이다. 상식을 상식으로 부르지 않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공동체의 믿음을 파괴하고, 법이 규정하는 공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고, 아래에서부터, 젊음으로부터 일어나는 혁신과 당돌함을 마치 바퀴벌레 보듯이 대하는 정치의 모습을 보는 우리는 별로 안녕하지가 않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고도의 지적노동은 일체의 정신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돌함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 후츠파의 철학과 맞닿는 부분이 상당하며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저토록 대단한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성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후츠파가 아니라 상식의 회복이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백준 IT컬럼니스트

한빛미디어에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2014),『누워서 읽는 퍼즐북』(2010),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2008), 『뉴욕의 프로그래머』(2007), 『소프트웨어산책』(2005), 『나는 프로그래머다』(2004), 『누워서 읽는 알고리즘』(2003), 『행복한 프로그래밍』(2003)을 출간했고, 로드북에서 『프로그래머 그 다음 이야기』(2011)를 출간했다. 삼성SDS,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도이치은행, 바클리스, 모건스탠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맨해튼에 있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분산처리, 빅데이터, 머신러닝과 관계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