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텔스타, 위성통신시대 열다 ④무르익는 기술

일반입력 :2013/12/16 17:51

이재구 기자

5■서서히 무르익는 기술...능동형 통신 위성기술 무르익다

존 피어스박사가 프린스턴대 초청 강연을 한 1954년 이후 4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 동안 많은 전자통신 기술이 발명돼 무르익고 있었다.

그가 예상한 우주에서 전원을 얻는 새로운 방식 외에도 통신위성이 우주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은 많았다. 지구에서 받은 신호를 위성에서 강력한 통신신호로 증폭해 보내는 방법, 대량의 통신신호를 한꺼번에 보내는 기술, 진공관보다 작고 수명이 긴 반도체, 지상에서 위성 의 미약한 신호를 크게 증폭해 수신할 혼 안테나(horn antenna) 등이 그것이었다.

피어스가 프린스턴대에서 강의할 즈음에 이미 위성에 필요한 몇가지 요소들이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발명된 지 7년 째인 진공관보다 작고, 깨지지 않으며, 전력소모량도 적은 트랜지스터였다. 1954년에 미국과 일본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막 등장했다. 이전까지 작은 상자크기였던 라디오는 이제 와이셔츠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졌다. 1947년 12월 벨연구소가 처음 만든 트랜지스터 덕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역시 통신 송수신 관련 기술이었다. 통신신호를 증폭해 광범위한 채널로 안정적으로 수신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 가운데 미약한 우주의 통신신호 신호채널을 다변화하고 중폭해 보내주는 진행파관(Traveling Wave Tube TWT)을 빼놓을 수 없었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야.”

그것은 1943년 어느 날 시작됐다. 피어스는 연구소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필요한 군용 진공관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옥스퍼드에서 연구중인 오스트리아 이민자 루디 콤프너(Rudi Kpmpfner, 1909~1977)의 진공관을 찾아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진행파관(Traveling Wave Tube․TWT)으로 불리는 이 진공관은 연필같은 두께에 길이가 30cm 정도 됐다. 관 안에는 기다란 전선이 스크린 도어 스프링을 늘려놓은 것처럼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통신신호, 즉 진행파는 전선이 감긴 스프링을 따라 전송됐다. 그러는 동안 전자가 모아진 집속(集束)빔(beam)은 스프링의 중앙을 통과해 전달된다. 이 두 가지가 상호 작용하면 전자빔에서 회전하고 있는 신호파로 상당한 에너지의 이동이 일어나게 되는 원리였다.

이 기기는 신호자체의 극적인 증폭은 물론 신호를 한번에 전송할 수 있도록 통신공간(대역폭)을 넓혀주었다.

“전화시스템에 사용하면 아주 유용하겠어.”

피어스는 사무실에서 콤프너의 논문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후 그는 1951년 벨연구소에 합류한 콤프너와 함께 1956년까지 다양한 종류의 모델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위성신호를 지상에서 전송하고 수신하는 것은 물론, 하늘에서 움직이는 위성의 위치까지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작하는 문제도 남아 있었다.

이에따라 필요해진 것이 혼 안테나(horn antenna)였다. 혼안테나는 전국 곳곳에 산재한 마이크로파 중계탑에는 이미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다. 특히 신호의 수신을 집중시켜 주변의 소음과 전파방해를 크게 줄이는 기능은 더할 나위없이 요긴했다.

1954년 후반에는 피어스의 인공위성 아이디어에 필수적인 또하나의 기술이 개발됐다. 피어스가 생각해 온 궤도위성에서 소진되지 않을 전원공급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1940년 벨연구소의 러셀 올이 처음 개발한 실리콘 솔라셀(태양전지)은 각광을 받았다. 태양빛을 전기로 바꿔주는 원리였다. 실리콘 기판이 너무 비싸 비효율적이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1964년 4월 벨 연구소의 세 과학자 즉, 물리학자 제럴드 피어슨, 화학자 캘빈 풀러, 전기공학자 대릴 샤팽이 러셀 올의 발견을 실용화할 새로운 연구결과를 공동발표했다. 벨연구소 보도자료는 이랬다.

“웨이퍼 두께의 얇은 실리콘 여러 장으로 만든 아주 간단한 장치를 이용해 태양빛으로 전기를 만들어 냈고 이 전기로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태양전지가 당장 보급하기엔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다. 결국 피어스의 텔스타위성에 적용되면서 본격적인 위성용 솔라셀 실용화의 물꼬를 트게 됐다. 인공위성용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우주에서는 위성배터리를 재충전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지의 비용이나 비효율성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마지막 남은 중요한 문제까지 해결됐다. 그것은 타운스의 통신전파 증폭 및 대규모 전송기기, 즉 메이저(MAZER)의 발명이었다.

1939년 벨연구소로 온 캘테크 출신 찰스 타운스(1915~ )의 연구 성과였다. 그는 여전히 대공황이 미국을 짓누르고 있는 시기에 교수의 권유로 벨연구소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이곳에서 마이크로파 생성,진공관, 자기고체학,고체물리학 등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머빈 켈리 벨연구소 소장(사장)이 그를 불렀다.

“항법장치와 폭격에 이용할 레이더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나.”

물리학박사인 타운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 연구를 수행했다. 2차대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이 연구를 통해 마이크로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이 우연한 기회는 전쟁이 끝난 후 컬럼비아대로 간 그를 전파연구로 이끌었다.

“어떻게 하면 파장이 짧은 전파를 만들 수 있을까?”

타운스의 고민이자 연구과제는 아주 강한 마이크로파를 생성하는 장치를 찾는 것이었다. 파장이 짧아지면 더 강력한 전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암모니아에 열이나 전기형태로 에너지를 공급해서 암모니아분자를 들뜨게 한 뒤 약한 마이크로파에 노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실험을 통해 분자는 마이크로파 형태로 방출되며, 이 마이크로파는 다시 다른 분자에 충격을 주어 그 분자가 연쇄적으로 에너지를 내놓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고에너지 복사선 빔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는 것이었다.

1953년 12월. 타운스는 어느 방향으로든 강력한 마이크로파를 생성하는 장치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960년이 되면 이 기술은 전파증폭을 넘어서서 빛을 증폭하는 레이저 기술로 발전한다.)

동료들은 이 장치에 '유도방출에 의한 마이크로파증폭(Micro Amplification by S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이란 의미로 ‘메이저(MASER)’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54년 마침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보았던 타운스의 메이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년간 타운스를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마이크로파가 아니라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개량형 연구에 몰두했다. 메이저의 가동 부분은 거대한 철제 시험관처럼 생겼다. 지름 20cm에 길이는 60~90cm정도였다. 암모니아 기체대신 손톱만한 크기의 유리는 액화헬륨에 담궈져 영하 271도(℃)로 냉각시킨 시험관 밑바닥 구멍에 배치됐다. 유리에는 전원에서 공급된 전기에너지가 퍼부어질 것이었다. 피어스는 이 메이저가 자신의 텔스타 위성 프로젝트에 쓰일 것이라고는 꾸멩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1957년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 왔다. 피어스의 오랜 친구 루디 콤프너가 메이저의 용도를 생각해 냈다.

“그렇다. 메이저는 궤도를 도는 위성의 희미한 신호를 증폭시키기에 꼭 알맞은 거야. 존도 메이저가 독보적이란 것을 인정할 거야.”

이 해 벨연구소 연구팀은 통신기능이 덧붙여진 세련된 메이저를 만들었다. 예상대로 메이저의 감도와 충실도는 다른 어떤 장치보다도 뛰어났다. 이 장치들은 나중에 빛을 증폭하는 레이저로 발전했다.

마침내 트랜지스터, 혼 안테나, 진행파관, 태양전지,메이저 기술이 갖춰졌다. 이렇게 핵심 전자부품과 기술이 모두 갖춰졌지만 최후의 난관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것은 이 위성을 지구궤도로 쏘아올려 줄 로켓이었다. 미국은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미사일용 로켓을 만들어 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위성용 로켓을 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던 1957년 10월 4일. 소련에서 인류 최초로 스푸트니크 위성을 발사하자 미국도 로켓개발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우주경쟁에서 소련에 뒤져 전전긍긍하던 미국은 4개월 후인 이듬해 1월 미국 최초로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면서 체면을 세웠다. 미국이 위성발사용 로켓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6■에코 발사 전후

이제 존 피어스 팀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것은 능동형 위성을 선택할 것인가, 수동형 위성을 택할 것인가였다.

피어스는 먼저 수동방식 위성으로 시도해 볼 것을 제안했다.

수동위성은 1,600km 높이의 상공에서 저궤도로 돌면서 지상기지국 엔지니어들이 신호를 송수신할 수 있도록 전파를 튕겨 주는 반사물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지상기지국에서 궤도상의 위성에 전파를 쏘면 위성은 이 신호를 반사시켜 지상에 있는 미 동부 뉴저지 홈델 지상기지국으로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반면 능동위성은 태양전지, 트랜지스터, 안테나, 진공관 등을 장착해 지구에서 쏜 신호를 증폭시킨 후 지상의 다른 곳으로 돌려 보내는 방식이었다. 우주에 있는 위성이 우주에서 중계기지국 역할을 하는 원리였다. 엄청난 중계거리와 중계기지국의 효율성은 지상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못됐다.

이론상으로나 실제로나 능동위성이 수동위성보다 당연히 앞섰다.

가령 지구에서 수동위성으로 쏘아올린 신호는 모든 방향으로 반사돼 처음에 보냈던 신호의 100만분의 1이나 그 100만분의 1정도가 각 지점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지상 어디서 수신하더라도 희미한 이 신호를 들으려면 고감도인 거대한 혼 안테나와 값비싼 메이저 같은 장비들이 필요했다.

반면 능동 위성으로는 강력하고 접근성 높은 신호를 광대역으로 송출할 수 있다. 지상기지국에서 위성에 어떤 신호를 전달할지 명령할 수도 있었다. TV신호를 보내는 것도 훨씬 쉬웠다.

하지만 피어스는 신중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팀이 수행하는 소규모 연구가 벨연구소 전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구개발에 비해 예산, 인력 등에서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연구소가 당장 몇 주, 혹은 몇 달 정도 아무 고장없이 견딜 튼튼한 능동위성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는 이미 10년 전에 벨연구소가 트랜지스터 개발에서 생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왔는지도 지켜봐 왔다. 경험많은 피어스는 이 위성개발 과정에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적고 실질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기 쉬운 절차를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1958년 초 낭보가 들려왔다.

버지니아주 랭리 공군기지 소속 정보기술자인 윌리엄 오설리번이 지름 31미터짜리 기구(氣球)를 띄워 대기권에서 실험할 계획이라는 소식이었다.

“알루미늄 껍데기를 씌워 만든 직경 30~60m 짜리 마일라(Mylar)로 만든 기구를 1,300km 혹은 1,600km 상공에 띄워 궤도운동을 시키려 한다는군.”설리번은 기구를 띄어 대기압을 측정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미국가항공위원회(The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 NACA)를 통해 이 기구를 쏘아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피어스와 콤프너는 이 기구 견본을 입수해 실험했다. 저항측정기(Ohm meter)로 도전성을 측정해 봤다. 전파 반사율은 98%에 달했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이 해 여름 피어스와 콤프너는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은 캘리포니아 제트추진연구소(JPL) 윌리엄 피커링소장을 찾았다.

캘리포니아 지상기지국이 있어야 기구를 성공적으로 발사했을 때 뉴저지의 홈델 지상국과 통신할 수 있었다.

“미 서부해안의 지상기지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기구를 궤도에 띄울 수 있다면 기지국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피커링은 이 제안에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몇 달 후 제트추진연구소(JPL)가 미항공우주국(NASA․나사)에 공식 인수됐다. 새로 온 케이스 그레넌 나사 국장은 벨연구소의 수동 위성 발사를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우주로 기구를 날려 보내는 일만이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동형 통신위성을 발사하기 위한 마지막 장벽은 벨연구소 내부에 있었다.

벨연구소 부소장, 연구실장이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머빈 켈리 벨연구소 소장(사장)이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느 날 그는 피어스와 함께 한 점심 미팅 자리에서 “그 계획은 가망이 없네”라고 잘랐다.

머빈 켈리소장이 자체적으로 이 위성 프로젝트에 대한 분석을 맡긴 결과 경제, 기술적 측면에서 모두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피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콤프너와 함께 다시 한번 문제를 제기하는 장문의 메모를 준비했다.

“올 한햇 동안 위성에 1억달러를 투자하면 이후에 훨씬 더 많이 돌아올 겁니다...위성은 케이블이나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저렴하게, 대서양 너머로, TV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채널을 제공할 수 있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벨연구소가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회사가 선수를 칠 겁니다”라며 통신위성의 경제성과 함께 경각심을 자극했다.

1959년 1월. 두 사람은 또다시 켈리소장에게 위성발사 프로젝트 승인을 요청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피어스도 지지 않고 주장을 밀고 나갔다.

“벨연구소가 위성통신 연구에서 앞서 나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위성통신을 기술적으로 평가하고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집쟁이 머빈 켈리소장 대신 후임인 짐 피스크 소장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코프로젝트(ECHO Project)라는 공식명칭도 주어졌다. 통신위성의 효용성에 눈을 뜬 짐 피스크 신임소장은 5천만달러를 투자하며 위성사업을 적극 뒷받침해 주었다.

에코위성 발사일은 1959년 가을로 잡혔다. 위성 제작작업은 피어스가 일하는 머레이힐에서도 50km 남쪽에 위치한 홈델(Holmdel)에서 이뤄졌다. 이 곳에는 책임자 콤프너 외에 혼 안테나 발명자인 짐 제이크스가 있었다. 연구진들은 에코 프로젝트용 지상수신소 설치 장소로 크로포드 힐을 선정했다. 1959년 해발 150미터인 크로포드힐 꼭대기에서 기지국 건설이 시작됐다. 기지국 안테나는 직경 6m짜리인 거대한 접시형이었다. 정교한 컴퓨터설비를 이용해 하늘의 위성궤적을 자동으로 추적해 따라 움직이도록 구축되고 있었다.

동부 뉴저지 홈델에서 궤도위성으로 전송된 신호를 받아 에코 위성에서 반사해 주면 이 신호는 먼저 서부 캘리포니아 죽음의 계곡 남쪽의 골드스톤에 줄지어 선 제트추진연구소(JPL)기지국에 닿게 돼 있었다. 여기서 위성으로 보낸 신호는 다시 뉴저지주 크로포드힐의 4각형 뿔담배 파이프처럼 생긴 거대한 12만8천달러짜리 혼안테나에서 수신되어야 했다.

크로포드힐에 설치된 혼 안테나의 준비가 끝났다. 위성이 움직이면 그 경로를 따라 혼안테나가 원형궤도 위를 움직일 준비도 끝났다. 혼안테나 안쪽에는 메이저가 설치돼 위성 신호를 4천배나 증폭해 들을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1959년 10월 하순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팀들이 워싱턴에 있는 나사 본부에 모었을 때 나사 관계자는 계획연기 소식을 전했다.

“가을로 예정돼 있던 발사일정이 취소됐습니다. 내년 봄에 있을 기구발사에 희망을 걸어야하겠습니다.”

이 동안 제트추진 연구소팀과 홈델연구팀은 발사에 대비한 일련의 통신실험을 준비했다. 달에 전파를 보내서 되튀어 지구로 돌아오게 하는 실험이었다. 미 대륙 양 끝 캘리포니아주와 뉴저지주에 위치한 기지국에서 서로 한쪽은 달에 무선신호를 쏘고, 다른 쪽에서는 반사돼 들어오는 신호를 기지국에서 수신하는 실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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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실험은 1959년 11월 가을에 실시됐다. 이른바 월면 반사통신(Moonbounces)이었다. 1960년 초 겨울까지 열두번 가량의 월면 반사통신 실험이 이뤄졌지만 성공률은 썩 좋지 않았다.

연구진들도 달에 전파를 쏘아 반사 실험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구 위 수백 킬로미터 상에 있는 궤도를 도는 기구에 금속필름을 씌워 전자반사 층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