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웨딩홀에 자리 내준 전자상가 신화

일반입력 :2013/06/03 14:45    수정: 2013/06/03 17:55

봉성창 기자

용산역에서 전자상가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오고가는 인파로 북적였다. 처음 이곳을 찾은 사람에게는 온갖 괴물이 득실거리는 던전으로 향한 긴 동굴과도 같은 묘한 긴장감을 선사하던 긴 통로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기자가 찾은 이 통로는 마치 오래전 문을 닫아 황폐해진 폐광 같은 느낌이었다.

요즘 국내 주요 전자상가들은 지금 물건 값을 흥정하는 소리 대신 곡소리가 가득하다. 용산뿐 아니라 강변역에 위치한 테크노마트와 양재동 국제전자상가 등 전문 상가 전체가 동반 하락세를 타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형편이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어려워지고만 있다고 업자들은 하소연이다.

파리 날리는 상가들... 당구나 치련다

용산 관광버스터미널에 있는 터미널상가는 과거 용산역 연결 통로를 지나 처음 소비자들을 맞이하던 위치적 장점 때문에 많은 인파로 붐볐지만, 철거 후 호텔로 개발하기로 결정 나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4층에서 소모품 도매상을 운영하는 업자는 “최근에 호텔 개발이 급물살을 타면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며 “용산 전체적으로는 50% 정도, 이 상가(터미널상가)는 70% 정도 손님이 줄었다”고 말했다. 3층에서 노트북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는 업자도 “용산 다 망했다. 하루에 한대도 못 파는 날도 많다”고 푸념했다.

터미널상가 관리를 맡고 있는 한 직원은 “연말까지는 모든 임대 매장이 철수해야 한다. 이미 큰 업체들이 인근 상가로 다 빠져나가 더 손님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침체는 이곳만의 상황은 아니다.

나진상가의 건물 한 동은 점포 하나를 빼고는 전부 문을 닫았고, 바로 옆 원효상가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트북과 조립PC를 판매하는 매장은 손님이 없어 미니 당구대에서 당구를 치는 판매직원들과 줄담배를 피우는 업주들만 보일 뿐이다.

강변역 테크노마트는 3층 일부와 4층 전체를 아예 웨딩홀로 바꿀 예정이다. 전자제품 판매업체들의 매출이 너무 부진하기 때문이다. TV를 판매하는 매장 직원은 “2002년까지는 손님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10분의 1로 줄어든 수준”이라고 푸념했다. 건물 관리인은 “다른 지역으로 아예 매장을 옮기거나 사업을 접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카메라를 판매하는 한 상인은 “온라인판매 업체가 늘어나 업계전체가 최소 마진만 남기고 판매하는 제살 깎아 먹기식 출혈경쟁을 하고 있다며 우리가게도 지난 달에 적자가 나 융자를 받아 겨우 가게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이 없으니 폐점하는 가게도 늘었다. 3층 일부와 4층 전체는 전자제품 매장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웨딩홀이 들어설 예정이다. 테크노마트 안내 직원은 “오는 6월 웨딩홀이 오픈하기 때문에 기존 전자제품 점포들은 모두 지난해 자리를 비웠다”며 “용산 등 다른 곳으로 옮긴 데도 있고 아예 매장을 접은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한 업자가 야반도주를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린다. 수년째 같이 장사를 해오며 신뢰를 쌓은 동료 업주들에게 물건을 대량 발주해놓고, 급기야 대금을 떼어먹고 해외로 도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하도 잦다보니 이제는 이곳 상인들에게 별로 대단한 뉴스도 아니라고 한다.

돌파구 없는 용산 신화, 이대로 무너지나...

용산에서 TV판매 전문점을 운영하는 업자는 “장사가 잘 안 돼서 요새 카드사와의 제휴 마케팅이 늘었다”며 “카드 사용액이 월 50만원만 돼도 TV를 50~60만원씩 할인해준다”고 말했다. 실제로 카드제휴를 통해 구매하면 62만원짜리 제품은 2만원에, 119만원짜리 제품은 48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할인 금액만큼 카드 포인트를 적립하지 못하면 추후 나머지 대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는 그저 조삼모사(朝三暮四)식 판매법이다.

양재동 국제전자센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유명 게임 타이틀 판매 매장 한 곳만 사람이 북적였다. 특히 게임 타이틀은 구입했다가 중고로 재판매하는 거래 행태가 자리잡았는데, 그 틈을 잘 파고 든 것이 비결이다. 매장 직원은 “새 제품과 중고 제품 판매 비율이 50 대 50 정도”라고 밝혔다.

단순히 불경기만 탓하기에는 전자상가들이 가진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소비자들은 소위 ‘용팔이, 테팔이’ 등으로 유명세를 탄 불친절한 판매 방식으로 인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진 것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했다.

반면 상인들은 한결같이 온라인 판매업자들의 증가가 전자제품 전문 상가 쇠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온라인 판매업체들이 이익을 최소화하는 최저가 경쟁을 벌이면서 서로 누가 끝까지 버티는가 겨루는 ‘치킨게임’이 일어났고, 이를 버티지 못한 중소업체들이 먼저 쓰러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롯데하이마트나 삼성 디지털프라자, LG 베스트샵 등 대기업계열 가전 유통업체가 곳곳에 생겨나면서 굳이 전문 상가를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가전 유통 환경 변화도 큰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건물의 노후화와 상가 건물 재건축설이 도는 것도 폐점하는 업체가 늘어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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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지만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기도 어려워 보인다. 온라인 매장을 함께 운영하면 경쟁력이 있지 않겠냐는 질문에 또 다른 한 상인은 가격 경쟁이 심화되면서 온라인 판매업체도 거의 마진을 남기지 않고 판매하고 있다며 여기나 온라인이나 힘든 건 마찬가진데 괜히 운영비만 늘리는 꼴이 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용산 터미널상가에서 14년째 경비원 일을 해오고 있다는 박 모씨(67)는“그래도 이 자리에 호텔 개발이 이뤄지고 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지지 않겠어요?”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이 좌초되면서 분위기가 많이 침체됐지만 그래도 호텔 개발과 인근 지역 정비 사업이 끝나면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조금이나마 품고 있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