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학술논문 공짜 공개해라? 업계 반발

일반입력 :2012/11/27 10:22    수정: 2012/11/27 15:21

남혜현 기자

'학술 논문 무료 공개(Open Access·OA)' 정책에 정부와 학회, 민간 업체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논문 접근성을 원활히 하겠단 취지지만, OA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판국에 정책 강화는 학회 자율성을 해친다는 주장이다.

26일 전자출판업계에 따르면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한국연구재단이 주도하는 '학술지 논문 원문 공개'를 놓고 업계가 진통을 겪고 있다. 논문 무료 공개 여부를 정부가 강제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논란은 지난 9월 한국연구재단이 '학술지논문 원문 공개 동의 안내' 공문을 학회들에 발송하며 불거졌다. 정부는 공문을 발송하며, 인문·사회 분야 OA를 활성화하기 위해 학회나 연구자로부터 원문 공개 동의를 확보한다고 밝혔다. 학술논문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 궁극적으로 연구자 명예를 키우겠단 취지다.

그러나 일부 학회, 민간기업들의 시선은 따갑다. 학술 논문이 장애 없이 무료로 제공돼야 한다는 OA 기본 취지엔 동의하면서도, 정부기관이 OA 가산점을 볼모로 학회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려 한다는 주장이다. 그간 기업이 꾸려온 산업 생태계 역시 허물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목소리다.

공문을 받은 학회들이 OA를 전면 채택할지 여부는 자율에 맡겨졌다. 그러나 한국연구재단은 OA 시행여부를 국내학술지와 우수학술지 지원사업 평가 항목에 배정, 각각 2점과 5점의 점수를 주고 있다. 학회가 연구비, 또는 논문 인쇄비 지원을 받기 위해선 정부 방침을 외면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특히 인문·사회 및 국내 상황에 국한된 주제를 연구하는 학회들의 경우, 국제저널(SCI)에 등재되기 힘든 형국이다. OA 점수가 포함된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되기 위해 연구재단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설명이다.

그간 국내 학회들은 선택적으로 논문을 무료 공개하거나 유료 판매해왔다. 정부가 운영하는 플랫폼 '리스포유'를 통해 논문을 유·무료로 발행하는 형식이다. 여기에 누리미디어, 학지사, 학술교육원, 교보문고 등 민간 기업들이 참여, 논문을 디지털 발행하고 유료 판매하는 시장을 만들어 왔다.

민간 기업들은 학회 논문을 발행하면서 육성된 시장을 약 200억원 규모로 추산한다. 영세한 학회들은 일부 논문을 유료 판매함으로써 그 수익을 학회를 유지하고 연구를 계속하는데 사용해왔다. 때문에 KCI 평가에 OA가 필수 항목으로 등록될 경우, 기존 디지털 논문을 발행했던 민간업체와 계약을 파기, 유료 판매로 인한 수익을 포기해야할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익명을 요구한 학 학회 소속 교수는 연구재단 측에서 어떻게 하겠다는건지 명확히 해주면 좋겠는데, 구체적인 방안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심사를 받는 입장에서 점수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수 있다라며 일반 민간 업체에서도 논문 디지털 발행을 해왔는데, KCI 등재에 따라 그 계약 관계를 해지하게 될 경우, 그쪽 사람들에 너무 박절하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인문사회 학회 1천200여 곳 중 동의서를 보낸 곳은 210군데다. 압박이나 강제였다면 모두 동의서를 보냈을 것이다. 각 지원사업에서 OA에 할당된 배점은 아주 작아 실제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산 중복 문제도 지적됐다. 교과부 산하기관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이 민간 업체와 함께 논문을 디지털로 구축하고 온라인서비스를 진행해온 만큼, 연구재단에서 KCI를 통한 OA 확대가 불필요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연구재단 측은 예산 중복 투자 문제를 일축한다. KCI에서 이미 원문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OA를 실시할 때 별도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KCI는 리스포유와 달리 등재후보지를 평가하기 위한 인용/피인용 정보를 분석해 2차 데이터를 제공하기 때문에 존재 목적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다만 업계에선 KCI가 원문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이를 디지털화하고, 별도 포맷으로 변형하거나 유지, 보수할 때 비용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2천년대 초반에 유사한 제도를 실시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며, 용두사미식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표했다.

여기에 전체 논문이 무료로 공개될 경우, 우리 논문의 해외 수출도 어려워진다고 업계는 설명한다. 해외 논문들이 수입되는 시장 규모가 2천억원인데 비해, 우리 논문들이 모두 무료로 공개될 경우 이를 돈주고 사갈 해외 출판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경표 누리미디어 이사는 해외 대리점들이 국내 콘테츠를 많이 탐을 내고 체계적 공급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보면 한국 정보는 너무 쉽게 무료로 접근할 수 있어 굳이 유료로 구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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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업체들은 지난 15년간 키워온 학술논문 서비스 시장이 정부 OA 정책으로 위축될 가능성을 염려했다. 학술논문서비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관련 IT 기술도 후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다.

한국전자출판협회 장기영 사무국장은 우리 논문 경쟁력을 키워 해외 수출해야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정부가 역수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상황이라며 저작권 문제를 생각해도, 정부가 연구자들에 OA를 강조하는 듯한 상황은 생태계를 오히려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