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실리콘밸리 상징에서 비웃음거리로

일반입력 :2012/11/21 14:47    수정: 2012/11/21 15:40

실리콘밸리의 상징이었던 HP가 비웃음거리로 전락해버렸다.

미국 씨넷은 20일(현지시간) HP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이날 HP가 1년전 오토노미의 분식회계 사실을 모른 채 111억달러에 인수했다가 88억달러를 감가상각처리했다고 발표한 데 따른 보도다.

HP에 대해 이날 주요외신들은 일제히 각종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오늘날 HP의 추락은 리더십의 위기 때문이란 평이 지배적이다.

HP는 실리콘밸리 주택가 차고에서 시작해 한세기동안 미국 IT역사를 주도했던 회사다. 그러나 현재 HP의 모습은 초라하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HP는 십수년 사이 혁신과 찬사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지나친 고평가', '감가상각' HP M&A의 실패 패턴

오토노미는 영국의 검색솔루션업체로 작년 HP에 인수됐다. 당시 HP를 하드웨어회사에서 SW회사로 변모시키려던 레오 아포테커 전 CEO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러나 HP의 오토노미 인수는 초기부터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외부 전문가들은 HP가 오토노미를 지나치게 고평가했다고 비판했다. 검색솔루션분야의 선두업체란 프리미엄을 감안해도 111억달러란 금액은 터무니없다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HP는 1년만에 실수를 자인해버렸다. 11억달러 인수비용에 더해 88억달러란 감가상각비용까지 들이게 된 것이다.

사실 HP에게 M&A는 실패의 역사다. 특히 최근 10년 사이 이 회사가 걸어온 M&A 행보 가운데 성공사례로 언급되는 게 드물 지경이다. 무엇보다, HP는 M&A 대상 회사의 가치를 터무니없게 고평가해 돈을 허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타임스는 HP가 2001년부터 인수합병에 들인 비용만 670억달러에 달하며, 현재 HP의 자본규모는 234억달러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지난 2008년 HP는 IBM과 같은 IT서비스 및 컨설팅사업에 나선다며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EDS)를 140억달러에 인수했다. 그러나 EDS를 통한 서비스사업은 성장하지 못했고, 결국 지난 8월 HP는 EDS 영업비용을 감가상각하기에 이른다. 당시 감가상각비는 108억달러였다.

2010년 HP는 또 한 차례 의외의 M&A를 단행했다. 휴대폰 제조업체 팜을 17억달러에 인수한 것이다. 팜은 웹OS란 독창적 운영체제를 보유했지만 시장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해 흔들리던 회사다. 모바일 기기의 OS를 보유한다는 점은 의미있었지만, HP는 팜의 웹OS 사업도 1년뒤인 작년 포기했다.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HP M&A '흑역사'는 컴팩이다. HP는 2001년 컴팩을 250억달러에 인수했다. 그 후 HP는 10년 뒤 120억달러를 감가상각비용으로 소모했다.

■구세주의 악령? 10년간 거쳐간 3명의 CEO

M&A 실패사례와 함께 HP를 10년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악령은 CEO다. HP는 칼리 피오리나를 시작으로 마크 허드, 레오 아포테커에 이르기까지 전임 CEO들의 불명예 퇴진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시련을 겪었다. 더구나, 새 CEO들은 영입될 때 회사를 구원할 구세주로 기대를 모았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HP를 이끌었던 칼리 피오리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며 의욕적인 기업구조개편에 나섰다. HP M&A 실패의 대명사로 꼽히는 컴팩 인수가 그의 작품이다. 칼리 피오리나는 2002년 컴팩 인수에 대한 주주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고, 이를 무시한 채 사업을 강행, 취임 이후 HP 주가를 63% 수준으로 하락시켜 퇴진했다.

2006년 HP의 구세주로 영입된 NCR 출신의 마크 허드는 4년 간 회사 주가를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마크 허드는 기업 내부 비용절감에만 몰두했을 뿐 R&D 투자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기술기업이란 HP 직원의 자부심을 허물어뜨렸다. 더구나 그는 잦은 구조조정으로 HP에 내재됐던 온정주의적 기업문화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2008년 EDS와 팜 인수는 마크 허드의 작품이다.

마크 허드는 2010년 직원과 성추문으로 해임됐다. 그는 당시 회사기밀을 외부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았다.

HP는 2010년 마크 허드 후임으로 SAP의 레오 아포테커를 구세주라며 영입했다. 레오 아포테커는 11개월 동안 CEO에 재직하며, HP를 하드웨어 회사에서 SW와 서비스회사로 변신시키려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작년 8월 PC사업부 분사, 웹OS 포기, 오토노미 인수 등을 발표한 뒤 내외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고 결국 해임됐다.

■멕 휘트먼, 내외적 악재에 리더십 위기

2012년 현재 HP를 이끌고 있는 멕 휘트먼도 구세주란 기대를 모으며 임명된 인물이다. 현 단계에서 멕 휘트먼 자체에 대한 평가는 섣부르다. HP의 기업회생작업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오토노미의 분식회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HP의 설명을 인정한다면, 레오 아포테커는 또 한번 리더십의 위기를 증명한 것이다. 캐시 레스작 HP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오토노미 인수추진 당시 111억달러란 금액이 고평가됐다며 레오 아포테커를 만류했지만 묵살당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HP는 PC, 프린터, 서버 등 핵심사업영역 모두 매출과 순익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HP는 회계연도 2012년 4분기 실적보고서를 통해 이 기간동안 68억5천만달러(주당3달러49센트)의 순손실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매출은 300억달러로 전년동기 대비 7% 감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88억달러란 감가상각비용을 안겨준 SW사업이 지난 4분기 14% 매출증가란 성적을 기록하며 유일한 성장사업으로 남았다.

관련기사

멕 휘트먼은 기업 내부의 경영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영업 및 공급망 관리(SCM) 체계를 재정비하는 것으로 회생전략의 첫단추를 꿰었다. 다음 차례의 전략은 향후 R&D 투자 확대와 SW 및 서비스사업 강화로 체질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씨넷은 HP는 미국 산업에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후폭풍이 크다라며 아무도 멕 휘트먼의 실패를 바라진 않는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