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코시스템즈가 경쟁사 주니퍼네트웍스가 먼저 걸었던 길을 뒤따르고 있다. 네트워크업계에 불어닥친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크(SDN) 열풍에 대응하는 시스코의 전략이 주니퍼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시스코시스템즈는 지난 6월 ‘시스코 오픈네트워크 환경(ONE)’이란 전략을 발표했다. 오픈플로 지원을 포함한 프로그램 가능한 네트워크가 골자다. 오픈플로와 별개로 기존의 어떤 시스코 네트워크 장비 운영체제(OS)와 연동할 수 있는 단일 API, 소프트웨어개발도구(SDK) 등을 통해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등 데이터센터 3개 구성요소의 관리를 통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중 SDK와 API 부분이 3년전 주니퍼네트웍스의 발표를 연상시킨다. 2009년 주니퍼는 ‘뉴네트워크’란 전략을 발표하며 자사의 OS인 ‘주노스'를 개방형 플랫폼으로 전환했다. API와 SDK를 통해 고객, 파트너, 외부 개발자들이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할 수 있게 했다. 주노스와 인프라 관리 솔루션를 통합해 데이터센터 구성을 자동화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니퍼의 이런 행보는 ‘주노스 생태계’로 불리며 네트워크업계에 개방열풍을 불러왔다. 3년전 주니퍼를 비웃던 시스코는 유사한 전략을 들고 나왔다.
■3년전 열렸던 ‘주노스 생태계’ 시스코 OnePK 닮았다
주니퍼와 시스코는 라우터 시장에서 경쟁하던 관계였다. 주니퍼는 2009년 기업용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 뛰어들면서 ‘라우터, 스위치 단일OS 논쟁’을 일으켰다. 주니퍼는 시스코가 IOS, NX-OS 등 제품군마다 다른 OS를 사용하기 때문에 네트워크 관리를 어렵게 한다고 주장했다.
‘플랫폼 개방’이란 승부수는 이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주니퍼는 하드웨어에 기반한 폐쇄형 플랫폼 때문에 고객들이 자유롭게 네트워크를 관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이미 3년 전 제기했다.
주니퍼는 네트워크 관리 플랫폼 ‘주노스 스페이스’와 ‘애플리케이션 마켓’ 등을 축으로 내세웠다. 주노스 스페이스는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프로비저닝, 관리, 지원을 자동화하는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이다. 외부 업체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주니퍼 장비에 연결할 수 있도록 한다.
주니퍼는 당시 SDK과 API를 제공할 때 파트너십 체결이란 방법을 사용했다. 개별 개발자나, SI, NI 업체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려면 주니퍼와 사전 협약을 맺어야만 가능하다.
시스코ONE에 포함된 플랫폼API인 ‘OnePK’는 주노스 스페이스와 유사하다. OnePK를 이용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거나 네트워크 장비 OS에 기능을 프로그래밍하게 된다.
OnePK는 현재 시스코 장비의 OS를 최신으로 업데이트하면 제공되는데, 개발자가 애플리케이션 개발과 기능추가를 하려면, 시스코와 협약을 맺어야 한다. 시스코는 요청자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등급별로 일종의 라이선스 비용을 부과한다.
한때 갑론을박을 벌였던 시스코와 주니퍼는 이제 동일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다.
■시스코-주니퍼 “SDN을 이미 제공하고 있다”
시스코와 주니퍼는 SDN과 오픈플로를 두고 ‘오래전부터 SDN을 제공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을 지 모른다. SDK와 API 외에도 두 회사가 수년동안 개발하고 목소리를 높였던 기술들이 SDN의 구현체와 같기 때문이다.
시스코는 2009년 넥서스 시리즈를 출시했다. 그중 넥서스7000이란 대형 스위치가 있다. 넥서스7000은 서버랙마다 달려 있는 톱오브랙(TOR) 스위치를 한데 모아주는 애그리게이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서버 간 통신을 원활하게 하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넥서스7000을 이용함으로써 TOR스위치는 복잡한 기능없이 원활한 트래픽 통신만 지원하면 된다. 네트워크 관리자는 넥서스7000만 관리하면 각종 정책을 하위에 존재하는 모든 스위치에 적용할 수 있다. SDN을 구현하는 방식인 컨트롤 플레인과 데이터 플레인의 분리와 똑같은 형태다.
주니퍼는 작년 ‘뉴네트워크’의 결과물인 큐패브릭(QFabric) 아키텍처를 발표했다. 큐패브릭은 TOR 스위치 역할을 하는 모듈형 스위치 ‘노드’, 각 노드를 연결하는 대형의 고속 전송장치 ‘인터커넥트’, 장비를 관리하는 ‘디렉터’ 등 3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아키텍처다.
시스코와 마찬가지로 랙에 존재하는 스위치는 트래픽을 오가게 하는 통로역할만 한다. 제어, 관리, 정책설정 등은 모두 중앙의 디렉터와 인터커넥트에서 담당한다. 관리자는 디렉터 상의 윈도를 통해 모든 장비를 제어하게 된다. SDN의 데이터 플레인이 큐패브릭 노드, 컨트롤러가 큐패브릭 인터커넥트와 디렉터에 해당한다.
시스코는 또한 소프트웨어형 스위치인 넥서스1000V를 판매하고 있다. 넥서스1000V는 물리적 네트워크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가상화 환경에서 생성되는 가상머신(VM)에 붙이는 가상 스위치(v스위치)다. 오픈플로 컨트롤러 개발업체 니시라의 ‘오픈v스위치’와 같다.
시스코ONE을 뜯어보면 SDN 컨트롤러 및 에이전트 SW 외에 새로운 건 없다. REST API와 SDK는 이미 제공돼온 것이다. 넥서스 1000V는 이미 6천여개의 고객사를 확보했다. 각종 네트워크 가상화 기술 역시 수년째 판매해왔다.
시스코나 주니퍼 등 네트워크 장비업체들이 SDN을 구현하는 여러 개념과 솔루션을 이미 내놨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시스코와 주니퍼의 고객들은 SDN과 오픈플로를 애써 만들고 있다.
■“왜 써야 하는지 생각하라”
SDN은 네트워크를 SW로 구현한다는 사상이다. 인프라 운영 주체가 업체별로 제각각인 솔루션에 종속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구글, 아마존, 야후, 페이스북처럼 대규모로 인터넷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들이 중심축을 이룬다.
시스코와 주니퍼의 솔루션이 존재하고 있는데 SDN과 오픈플로를 제창하려는 노력은 호환성에 있다. 시스코와 주니퍼의 솔루션은 그 자체로는 훌륭한 성능과 효과를 제공한다. 하지만, 시스코와 주니퍼의 솔루션을 함께 사용할 수는 없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같지만, 구현하는 방법론과 기술이 달랐던 탓이다.
SDN을 제창했던 세력들이 말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IT인프라를 한 솔루션으로 단일화하지 않고, 여러 업체의 제품을 함께 사용하는 한 솔루션업체가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통합과 자동화는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다.
IT솔루션업체가 설파했던 서비스중심아키텍처(SOA)가 ‘그들만의 리그’였던 탓에 고객들이 스스로 대안을 찾아 나선 게 SDN이라 볼 수 있다. 또 SDN구현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오픈소스로 하겠다는 계획이 오픈플로다.
시스코가 주니퍼의 주장을 3년 만에 따랐다고 해서, 주니퍼가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 50달러에 육박했던 주니퍼의 주가는 현재 17달러까지 하락했다. 현재 주니퍼네트웍스는 SDN이나 오픈플로와 관련된 각종 포럼과 조직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시스코는 오픈플로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단지 완성되지 않은 기술을 섣불리 도입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시스코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오픈플로 표준화 작업을 주도하는 오픈네트워크포럼(ONF)는 출범한지 1년을 갓 넘겼다. 현존 오픈플로 표준은 MPLS, BGP를 지원하지 않는 등 필수적인 기능들이 다수 빠져있다. 오픈플로 컨트롤러 중 실제 환경에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의 솔루션은 VM웨어가 지난달 인수한 니시라가 유일한데, 공급된 회사는 알려진 바 없다. NEC에서 판매하는 오픈플로 컨트롤러 어플라이언스는 고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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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뒷배경과 해석을 배제하고 시스코의 주장 중 하나는 확실한 진실로 보인다.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시스코의 카우스투브 다스 시스코ONE사업부 제품마케팅 총괄 이사는 그는 “구글같은 회사는 직접 SW를 개발할 동기부여가 충분하고 역량도 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섣부른 도전은 큰 실패를 낳을 수 있다는 경고다. 그는 “SDN은 현재 다양한 용어로 나타나고 있어 많은 혼란을 주고 있다”며 “SDN, 오픈플로, 오픈스택, 네트워크 가상화는 다른 것이며, 곳곳에서 각자의 시각으로만 SDN을 얘기할 뿐 왜 바꿔야 하는지, 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