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에게 PC사업 분사는 치명타다"

일반입력 :2011/10/04 14:56

시스코시스템즈가 HP의 PC사업 분사계획에 대해 치명타란 분석을 내놨다. PC사업을 떼어내면 매출이 줄어들 뿐 아니라 부품 수급에서 규모의 경제를 상실해 프린터, 엔터프라이즈 하드웨어 및 서비스 등 전 사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의 한 IT포털사이트는 로버트 로이드 시스코 세계영업총괄 부회장이 작성한 HP관련 사내 문건를 입수해 공개했다. 로버트 로이드 부회장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사내 문건을 통해 HP가 PC사업을 분사하면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로이드 부회장에 따르면, HP의 최대 경쟁력이던 막대한 서플라이체인과 채널파트너 네트워크가 PC사업 분사 후 연쇄적으로 붕괴돼 사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주목한 지점은 ‘규모와 채널 생태계’다.

■PC사업 분사=부품 구매 규모의 축소=가격 상승

HP는 전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고 공고한 서플라이체인을 확보해왔다. 이는 HP 가격경쟁력을 보장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HP는 납품받는 부품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그만큼 납품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납품가격 하락은 완제품의 마진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마크 허드 HP 전 CEO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채널 파트너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PC 판매를 주로 하는 채널사가 고객에게 프린터, 네트워크 솔루션을 함께 공급하도록 하면서 다양한 지원정책을 마련했다.

로버트 로이드 부회장은 PC사업 분사는 곧 규모의 경제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납품 물량 자체가 줄어들어 가격 협상력을 잃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그는 기업용 하드웨어 및 서비스, SW, 네트워크, 프린터 등의 전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예측했다.

HP PC사업부는 1년에 이 회사가 사용하는 메모리의 25%를 구입한다. x86프로세서도 전체 구입량의 17%를 소비한다. PC사업이 사라지면 그만큼 납품량이 줄어든다.

그는 “HP의 서플라이 체인의 영향으로 2-5% 마진을 잃을 수 있다”며 “HP는 총이익 감소와 소비자 가격상승, 채널 파트너 마진감소 등을 흡수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매력 감소에 따른 수익성 악화의 선례로 IBM을 들었다. IBM은 2004년 PC사업부를 레노버에 17억5천만달러에 매각했다. 당시 IBM의 PC사업은 전체 매출의 11%를 차지했고, 이익은 0%였다.

IBM은 PC사업을 떼어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사업비중을 이동했고, 또 성공했다. 반면, 하드웨어 사업은 하락세를 겪었다. IBM은 2004년 이후 5년 간 전체 서버 시장의 2%를 잃었다.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사업의 이익도 3% 하락했다. 로이드 부회장은 “이같은 실적 하락은 IBM이 PC사업부를 방출한 후 구매력과 규모의 경제를 잃었던 것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HP는 IBM과 비교해 PC사업에 더 많은 의존성을 보인다. HP의 PC사업은 전체 매출의 32%를 차지하며, 회사에 13%의 이익을 가져다 준다.

구매력 상실은 세계 x86 프로세서 시장에서 HP의 비중을 대폭 감소시킨다. HP는 x86 프로세서 시장에서 20%를 차지하는 대형 고객이다. 그는 PC사업 분사 후 이 수치가 0.3%까지 떨어지게 될 것으로 추정했다.

■PC와 엔터프라이즈 하드웨어는 생태계를 공유한다

서플라이 체인으로 비롯되는 문제는 채널 파트너와 SMB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HP는 PC와 프린터 사업 대부분을 부가가치판매업자(VAR), 즉 판매점 및 채널사에 의존한다. HP가 대기업 시장을 맡고, 시장의 나머지와 미세한 부분은 파트너에 의지하는 형태다.

HP PC사업부 파트너들은 SMB, 공공, 교육시장 등에 대한 HP 서비스의 사업영역과 고객 접촉면을 확대시킨다. 이들의 역할은 PC판매뿐 아니라 저가 볼륨서버와 네트워크 장비, 소프트웨어, 기타 높은 수익의 HP제품까지 교차 판매한다.

때문에 HP는 파트너에 대한 각종 지원책으로 펀드를 운영해왔다. HP PC 사업부는 약 6천만~10억달러의 채널용 자본금을 집행한다. 각종 프로모션, 시장 개발, 공동운영 펀드 등의 형태로 채널사 영업과 기술지원과 관련된다.

HP는 원스톱쇼핑, 파트너 영업비용 절감 등에서 파트너를 붙잡는 가치를 제공한다. 이는 SMB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SMB 고객에게 PC를 공급하는 HP 채널사는 기타 인프라 제품을 번들로 제공하거나 저가로 판매할 수 있다. HP가 SMB 영역에 공급하는 PC를 제외한 모든 제품의 판매량은 약 35~50%에 달한다.

로이드 부회장은 “PC 주도없이 이뤄지는 영업은 채널들의 평균적인 고객 대면시간을 약50% 감소시킬 것”이라며 “평균적인 영업 규모도 35%까지 줄어들고, 채널 지원용 자금도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이어 “HP는 SMB와 공공 고객을 끌어오던 채널사에 대한 장악과 지원에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고 더 많은 돈을 들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대로, SMB 기업들은 전보다 높은 가격으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HP 가격의 상승과 더불어, 번들로 제공받던 제품들을 실제 가격으로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HP의 모든 사업부는 고객과 채널, 서플라이 체인 등 생태계를 공유한다. 데이터센터 하드웨어, PC, 프린터 등의 세가지 사업영역은 HP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고객을 데이터센터와 캠퍼스 고객으로 나누면, 60 대 40의 매출비중을 보인다.

이중 프린터와 네트워크 장비 사업은 PC 사업과 고객이 상당부분 겹친다. 데이터센터 인프라와 소프트웨어 구매자는 서비스사업와 연결되며 PC사업과 서플라이 체인을 공유한다. PC는 프린터와 엔터프라이즈 하드웨어 서비스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PC사업이 사라진다는 것은 프린터 사업이 고리를 잃고 따로 떨어져 '붕 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총체적인 난국은 마크 허드 전 CEO의 작품이다. 마크 허드 체제에서 HP는 비용효율화를 통해 매출과 수익을 끌어올렸다. 단순히 내부 지출을 절감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크 허드는 교차판매를 채널 파트너에 장려했다. PC와 엔터프라이즈 하드웨어 부품도 동일한 납품업체를 활용하는 것으로 물량을 늘리고 납품가를 낮췄다.

이런 구조 속에서 HP의 PC사업이 사라지면 서플라이 체인과 채널사는 매출에 직격탄을 맞게 된다.

■“오토노미는 HP의 소프트웨어를 살릴 수 없다”

레오 아포테커 뒤를 이은 멕 휘트먼 신임 CEO도 소프트웨어 업체로 가는 HP의 비전을 천명했다. 로이드 부회장은 HP의 소프트웨어와 비즈니스 컨설팅 역량이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IBM, 오라클 등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HP의 인프라 매니지먼트 소프트웨어는 훌륭하지만, 미들웨어나 비즈니스 컨설팅의 깊이에서 빈약하다”며 “IBM처럼 되기 위한 과정에서 오토노미 인수는 HP의 SW 역량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어지는 설명이 재밌다. 오토노미는 BI플랫폼으로서 비정형 데이터를 수집해 가치있는 정보로 가공하는 솔루션을 갖고 있다. 그는 오토노미의 정보관리SW는 틈새시장이며, 미들웨어나, 데이터베이스, ERP 등의 핵심역량 확보에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추가적인 대규모 인수합병(M&A)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스코 임원답게 HP의 네트워크 사업에 대한 전망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지난 몇년간 HP의 네트워크 사업은 HP란 이름값과 미투(Me Too) 전략, 저가 제품 등으로 사업성장을 시도했다”라며 “그러나 저마진 판매에서 벗어나려던 레오 아포테커의 경영전략이 네트워크 사업에 불확실성을 만들어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PC사업부 분사는 HP에게 많은 어려움을 만들지만 그들은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함께 PC사업 분사 후 포스트PC 영역도 경쟁사에 뒤처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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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PC시장은 태블릿으로 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그나마 마진율도 경쟁사의 저가제품에 하락할 수밖에 없다”며 “볼륨 서버를 비롯한 저가 인프라 시장 역시 델이나 중국의 저비용 생산자의 압박을 견디면서 경쟁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하이엔드 분야 역시 기술과 아키텍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춘 시스코와 EMC는 제품 혁신을 유지해 HP보다 넓은 마진폭을 유지할 것”이라며 “전체 매출의 2.5% 밖에 R&D에 투자하지 않는 HP는 혁신 엔진을 가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